거실을 맴돌고 지나는 바람만 가득할 뿐
소리도 모두 사라진 공간을 채운 어둠만이 숨통을 누르고 있다
달빛조차 숨죽인채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창밖을 서성이고
짙은 어둠속 유일하게 반짝이는 눈빛만이 나를 올려다 본다
"날.....그만 놔 줘"
" ..... 사랑한다며....."
"더이상 나를 그리고 너를 속이고 싶지 않아"
"제발..."
나를 사랑한다 속삭이던 입술이
이별을 고한다
반짝이던 눈빛이
한순간 퓨즈 나가듯 툭 꺼져버렸다
나를 향한 사랑이
허공속에 흩어져버렸다
너를 위한 사랑이
주인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난 친구도 사랑도 하면 안되는 사람으로 자랐어 그런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사랑하게 됐어 너는 사랑이 아니여도 좋아 내 곁에만 있어 "
"널 증오해"
"그것도 사랑의 또다른 모습이라면 난 괜찮아"
"내가 죽는다면?"
"죽더라도 내 옆에서 죽어"
"....죽어도 넌 날 가질 수 없어 영원히"
감정이라곤 한가닥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바닥에 내던져진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온 몸을 휘돌아 나간다
"선재야...내 말 듣고 있어?"
"그만. 그만하자"
마치 오랜시간 준비해왔던 말을 내뱉듯
내게 하지 못했던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마음을 서서히 펼쳐내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나에게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고 싹을 잘라내듯
낮게 읊어내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힘이 .....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무리 연습이지만....
너무 실감나게 연기하는 솔을 보며 울컥했다
상대역을 맡아 도와주는 역할을 솔에게 맡기고
그핑계로 애정씬은 더 실감나게 하면서 사리사욕을 챙기긴 했지만
오늘같은 상황은 예상에 없었다
저렇게까지 리얼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대충 분위기만 맞춰도 될텐데
굳이 눈빛까지 바꿔가며 했어야 했나?
"연기잖아 ~ 허구잖아~"
"그러게 허군데 가짠데 왠지 네가 진심 담은 것 같아서...."
"선재야 ~ 사랑해 ~~"
"사랑한다는 말로 모든 걸 무마시키려하....."
내 입을 꾹 막아버린다
촉촉한 솔의 입술이 닿아 더이상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틀어막아버리는데 알면서도 당한다
"선재야 나보다 네가 딱 일주일만 더 살거라고 했잖아 그말은..."
머뭇거리며 눈을 껌뻑이는 솔의 표정 한 구석에서부터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랗고 맑은 색이 젖어들어온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 눈으로 스며들어 발끝까지
촉촉히 적셔진다
솔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 듣지 않아도 이미 답을 들었다
솔은 항상 그랬다
말보단 눈으로, 웃음으로, 숨 쉬는 모든 순간 내게 말하고 있었다
매번 느끼고 감격하고 행복해하다가
바보처럼 잊어버리고 오늘처럼 서운해 한다
"내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내 옆에 있을거구 내 마지막 숨결이 널 향해 있을거란 말이야 내 평생은 류선재만 사랑하다 죽을거야"
" 다시 말해줘"
" 넌 남은 일주일동안 바람필 수도 있겠지만 난 너만 바라보다가 눈 감을거라고~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안되겠다 그냥은 죽을 수 없다 같이 가자"
웃으며 내 품을 파고드는 널 어쩌냐
서운했다가 행복했다가 하루에도 수십번 롤러코스터 태우는 널
사랑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며칠 전 방정리를 하던 솔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약간 색이 바랜 노트 하나를 들고 웃으면서
"고등학교때 친구들하고 썼던 노트인데 그때 불꽃튀기던 질문이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과 나 둘 중 한명만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 대부분은 답이 같았는데 현주랑 나만 달랐어"
"보편적 대답은?"
"자기가 죽는다였지 사랑하는 사람위해선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그럼 너랑 현주는?"
"현주는 둘 다 죽는다"
"너는?"
"나는.....남자를 죽인다"
너무나도 당당한 표정으로 어깨까지 으쓱대며 말하는 솔이가 무서워진다
난 널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란 답을 기대했던걸까?
서운함도 있지만 뭔가 무서워진다
"왜 남자를 죽여?"
"너랑 같은 이유"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내가 슬퍼할 것이 맘 아프다며? 나도 그래 날 보내고 슬퍼할 널 볼 자신이 없어서 ... 내가 평생 슬퍼하며 사는게 나을 것 같아서. 내 맘 속에선 영원히 살아 있을테니까....내가 죽으면 그때 그 사람을 기억해 줄 사람이 사라지게 되는 그때서야 그 사람도 죽는거야 그리고....딴 년 만나서 애 낳고 사는 꼴은 못보겠어"
감동 포인트인지 공포 포인트인지
뒷골이 띵하며 머리카락이 쭈빗 선다
자신은 잊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상대는 믿을 수 없다며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눈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배신은 곧 죽음이다'
눈으로 온갖 욕을 하는 것 같아서 쳐다볼 수가 없다
잘못 걸리면 세상 등지는 건 시간 문제일 듯하다
"선재 널 만나기 전이였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없이 행복해지는건 참을 수 없었어 그런데 넌 나 죽으면 재혼해 너는 허락할게"
"죽인다더니?"
"넌 봐줄게"
봐준다고 하면서 표정에 뭔가 꿍꿍이가 보인다
분명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내가 너 아닌 누굴 마음에 담고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일텐데
이미 오랜시간 그 지옥 속에서 살아 본 나에게
또다시 지옥 속으로 들어가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는 널 보며 머리가 멍해졌다
"이미 내게 천국을 누리게 해줬으니까 너도 천국을 느끼라고. 나랑 같이 살았던 시간이 천국이였다고. 네 기억 속에 내가 있다면 내 마음 속에 네가 있다면 어디든 천국일꺼야 "
또다시 한 대 얻어맞았다
나를 모르던. 나만 널 알던 때의 내 마음은 지옥이였지만
널 알게된. 너도 나를 알게 된 지금의 내 마음은 천국이란 걸
우리가 에리다누스의 강을 건너
눈과 비가 오는 것도
내가 너를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때가 온다해도
나는 천국일거란 걸
행복함에 노래부르며 곧 다시 만날 널 기대하며 있을거란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날도 지금도 넌 내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였던 인생을
다시는 살지 말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없는 날이 오더라도
내 안에 있는 널 품은 인생은 지금까지와는 다를거라고
오랜시간을 건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내게
잊지말라고
사랑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솔을
꼭 안고 살아갈 매일을 꿈꾼다
"그런데 선재야...."
"응 말해"
"나 죽은 다음에 재혼하면 데리고 갈거다 도저히 네가 딴여자랑 같이 있는 건 못 보겠다 그냥 같이 가자 이젠 내가 널 못 놓겠다 "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강력한 고백에 넉다운된다
내가 처음 반했던 씩씩하고 강단있던 솔이 잘 커서 더 단단해져있다
딱 100년만 같이 살고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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