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제의가 들어왔다.
그동안 내 영상들은 물론 이번 선재 영상을 보고 구성력이 좋다면서 영상 편집보단 시나리오 구성 작업을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그동안의 내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생각되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쓴 글과 머리 속에 떠올린 장면이 하나된다면? 다른 이의 생각을 영상으로 형상화하던 수동적인 자세에서 내 의지대로 표현 할 수 있게 된다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 보는 기회가 내 눈 앞에 와 있다
본 시네마 건물 입구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한발 딛었다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 넓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 안녕하세요 임솔씨 기다렸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태성의 목소리.
닫힘 버튼을 와다다다 눌렀지만 몸으로 문을 막고 버티고 있었다
복도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다른 직원들이 나왔고 그중 나와 미팅 약속을 잡았던 직원의 안내로 사무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임솔씨 영상 보면서 구성력이 좋더라구요 시나리오 작업도 같이 하게 되면 더 짜임새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솔씨도 우리 본 시네마도 윈윈이지 않을까요?"
"단 하나만 물을게요. 개인적 감정이나 상황으로 추천한 것입니까? "
"절대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임솔씨에 대해 대표님이 알아보라고 하셨고 때마침 이 일을 제가 맡은 것 뿐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천연덕스럽게 기름 좔좔 흐르는 목소리로 회의를 진행하는 태성의 얼굴을 보면서 기함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성이를 피하겠다고 내게 열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내 앞 위에 놓인 대본 <기억을 걷는 시간>
왜 하필이면......
기억을 잊은 사람과 기억을 지우는 사람의 이야기
운명인걸까.
우리의 비밀이, 서로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세상에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며칠 전 대본 연습 때 우리를 침묵에 싸이게 했었던,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진실이 사실이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수 있다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고 태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 시놉시스를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연히 너와 선재가 함께 있는 걸 봤어. 이상하게도 너희와 이 시놉이 계속 겹쳐 보이더라. 그땐 류선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야 한다고 추친 중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며칠 전 선재 반응을 보니 뭔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이건 순전히 내 똥촉이겠지만.
대표님은 네 영상에 피사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애정이 담겨 있다면서 우리 영화에 꼭 필요하다고 계속 계약 성사시키라고 하셔서 널 만나려고 계속 찾아갔었던거야. 오랜만에 전여친 보고 싶다는 흑심도 있었구. 농담은 그만하고 우린 네 능력이 정말 필요해 "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
선재에게는 멜로의 제왕 자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
나에게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다면 우리 둘 모두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
아도르노 철학의 부정적 용법
철학이란 현 세계의 파괴를 몰고 오는 상황에 대한 인식, 세계가 오늘은 파라다이스가 될 수도 있지만 내일은 지옥이 될 수 있다 곧 세계의 고통, 고통 당하는 세계를 표현해야 것이다
고통은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 지배의 결과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며 바로 이 고통에 대해 허락하는 것이 모든 진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 있을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네 고통이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짊어지고 같이 걸어갈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침묵이 선재와 나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뿌리 없이 떠다니는 부평초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한다면 나 자신을 온전히 아까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선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영혼을 갉아먹으면서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긍정적으로 밝게 살고 싶다
그러나 지난 15년의 뻘 속에서 버텨온 삶이 한순간 밝아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다
우울함이 나의 근간이 되어버린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다만 단 1센티라도 위로 올라올 수 있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선재는 나에게 뻘에서 나올 수 있게 내밀어준 작은 뻘판이다
뻘 속의 꼬막을 캐러 나온 여인들의 땀이 배인 뻘판
숨겨져 있던 행복을 찾으러 나온, 선재와 나의 눈물이 뻘에서 나올 수 있게 점성을 줄여준 것이다
사실을 밝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작품을 통해 각자가 위로를 받고 치유할 수도 있다
그래 나를 위해 선재를 위해 우리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한다
"선재야 <기억을 걷는 시간> 참여하기로 했어"
"꼭 ...해야해?"
"대본 살펴보니까 꽤 흥미있어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지워버린 기억은 지워진 이유가 있을꺼야 그냥 지워진 대로 두기로 했어.
지워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거. 기억을 되찾아야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같아서 해보고 싶어.
그리고 새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내 선택 지지해 줄거지?"
내 손을 꼭 쥐고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이는 선재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 자주 얼굴 못 볼 수도 있겠다 촬영 전과 후에는 내가 바쁠꺼구 촬영 중에는 네가 바쁠꺼구 우리 보고싶어서 어쩌지?"
"안돼"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친다
싫어도 어쩌겠어
"선재야 날 이해해주면 안될까? 화 내지 말구"
"대신 언제든 충전해줘"
"그래 충전 해줄게 근데 뭐?"
응큼한 눈빛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번쩍 들어올렸다
눈, 코. 입
천천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선재의 입술이 어루만져 주었다
온 몸의 뜨거움을 서로 나누며
입술이 퉁퉁 붓도록 밤새 행복을 충전했다
"에휴....꼬리는 떼어 놓고 오면 안될까?"
"꼬리? 없는데?"
"니 꼬리 저기 있잖아 오늘 회의는 다 했네 다 했어 내일 회의땐 떼 놓고 와"
태성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무음의 비속어가 스물스물 나오는 늑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평생의 단 하나의 짝만을 사랑하고 기억한다는 늑대
사랑하는 짝꿍을 잃은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습관은 모두 버리고 짝꿍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추억한다는 늑대
나에게 그런 늑대 한 마리가 있다
응큼하기도 귀엽기도 한 나의 늑대를 향해 달려간다
"선재야 나도 충전!!!"
"까악!!좋아!!"
회의실 블라인드를 급하게 내리며 망 봐주는 좋은 친구 태성 덕에 오늘도 우린 행복을 충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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