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운다
꽁꽁 언 눈이 머리 위로 운다
언젠가부터 감각을 상실한 마음 위로 눈이 흐르지 못하는 눈물로 운다
내 푸른 날을 가득 채우던 솔
그날 내가 손을 내밀었다면
내 가방따위 내던지고 솔의 손을 잡았다면
같이 눈을 맞으며 웃을 수도 있었을까
소나기
내 삶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점이 될 노래
소나기를 부를 때마다 떠올려본다
20살의 솔은 반짝이겠지
25살의 솔은 화사하겠지
30살의 솔은 포근하겠지
34살의 솔은 아름답겠지
나만 아니였다면.....
솔의 행복을 일상을 젊음을
내가 부서버렸다
왜 살렸냐는 절규가 가슴에 박히고
솔의 울음이 피를 타고 온몸에 상처를 남겼다
매순간 숨쉬는 호흡마다 솔의 비명이 내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라도 괜찮다
이 세상에 어디선가 솔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솔의 한숨이 내게 쏟아져 들어오길
그렇게라도 네가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이젠 더 이상 노래할 힘도 아니 숨 쉴 기운도 남아있지 않다
이대로 세상을 멈춰도 슬퍼할 이 하나 없을테니
콘서트 무대를 뒤로 한 채 멍하니 차창 밖만 보고 있다
검은 물결이 날 삼킬 듯 출렁이며 손짓을 한다
물 속에선 숨 쉬는 것도 어떤 것도 자유로웠다
그때의 기억이 나를 부른다
화려한 불빛 사이
차를 멈춰 세웠다
휠체어 하나가 다리 위에 서있다
내 마음 한구석을 잘라낸 그 애가......
신기루 같은 허망함이 휘몰아쳤다
내 앞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내 눈에 보일 리가 없잖아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갈수록 또렷해지는
솔이다
"휠체어 고장 났어요?"
나를 보고 놀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이는 그 애
그대로다
반짝이는 햇빛 같은 미소
오랜만이네
"왜 울지 난 안 울렸는데?"
항상 난 널 울리기만 하네
"팬이예요"
팬...팬이라.... 재밌네
그때의 나는 네게 없구나
지워진 기억이 널 살게 한 거라면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나 따윈 잊어도
"데려다줄게요 괜찮죠? "
연예인 선재로만 보는 솔의 상기된 표정에 씁쓸한 감정이 들지만 이렇게라도 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빨갛게 언 손에 핫팩을 쥐어주고 뒷자리에 뒀던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다
와락 껴안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으로 마음을 동여맸다
힐끔거리며 나를 보는 솔을 향해 몸을 확 돌려서 눈높이를 맞췄다
네 숨소리가 귓가에 세세히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
지금까지 네게 다가갈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거리
이제서야 네가 나를 봐주는 구나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내 팬이였어요?"
"데뷔 초부터 팬이였어요"
"오늘 공연은 잘 봤구요?"
"티켓 잃어버려서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세트 리스트엔 소나기 없었는데 왜 불렀어요?"
네 생각이 나서.....
내 마지막을 위해서....
"내 인생 유일한 노래라...앞으로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홀로 선 세상 속에 그댈 지켜줄게요
하늘이 흐려도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노랫말이 정말 와 닿아요 저 소나기 때문에 살 수 있었어요
그날 전화도"
"전화?"
"데뷔 초에 라디오 연결 때 통화한 적 있어요 날이 좋으니까 살아보라며 비가 온다고 견뎌보라고
그 말 붙잡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살게 해줘서"
솔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모른다며 싸늘하게 답하던 솔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너무 힘들었던 날이라 날카로웠어요 류선재씨의 살아보란 말에 힘 냈구 그날부터 팬이 됐어요
그래서 만약에 정말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뭔데요?"
추워서 발그레진건지 긴장해서인지 상기된 볼에 보조개가 살포시 패이며 웃는다
"류선재씨도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항상 웃지 않아도 돼요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해줘서 고마워요"
존재해줘서 고맙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널 통해 듣게 된 이 상황이 낯설지만 꼭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 하나를..
울컥하는 마음에 추워하는 솔에게 건네려던 커피를 움켜쥐다가 솔의 자켓에 쏟았다
"미안해요 어쩌죠? 제가 보상할게요"
"아니예요 오늘 태워다 주신 것도 고마운데 폐 끼치기 싫어요 "
"아뇨 좀 전에 저한테 말했잖아요 솔직하라면서요 제 맘 편하게 해줘요"
억지부리다시피 솔의 코트를 빼앗아 들었다
"세탁해서 줄게요 오늘은 추우니까 내 꺼 입고 가구요"
차 안에 널린 게 내 옷인데 굳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었다
내 온기가 널 품어줬으면 해
핑계로 솔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바로 앞에 두고 전화를 건 내가 이해 안된다는 표정
"혹시나 가짜 번호면 어떡해, 내 옷도 받아야 하고, 이 번호 뜨면 꼭 받아요 "
약간은 능글 맞은 표정으로 찡긋 웃으며 말했다
좀 전과는 다르게 솔에겐 무장해제 되는 기분이 들어 미소가 지어진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귀 코 입 얼굴을 물이 안아주었다
살고 싶어서 숨 쉬고 싶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만큼.
띠링
눈이 번쩍 뜨였다
평소 같다면 모든 연락 다 무시했을텐데 스프링 튀어 오르듯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고마웠어요 꼭 연락 주세요 코트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좋은 꿈 꾸세요>
아주 우연히 만난 너를 향해 걸어갈 때
너 없는 시간을 홀로 걸어가던 나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네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데 숨이 쉬어진다
어둠이 목을 움켜쥐고 흔들며 온몸을 짓누르던 꿈이 아닌
색색의 풍경이 가득한
네가 서 있는 꿈을
<솔씨 일어났어요? 전 덕분에 잘 잤어요. >
<제 덕분이요? 어제 너무 신경 쓰게 했나봐요 미안해요>
<아뇨 아뇨 좋은 꿈 꾸라는 말에 진짜 행복한 꿈 꿨어요>
<다행이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솔씨도요 제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오늘 뭐할거예요?>
문자의 말꼬리를 얼른 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알바해요>
<알바? 어떤?>
<영상 편집 알바해요>
<어! 그럼 나 부탁 해도 돼요? 영상 찍은 거 편집 해줘요 물론 절차 제대로 밟아서 의뢰할게요. 그러려면 포트폴리오 한 번 봐야하지 않을까요? 시간 언제 괜찮아요?난 언제든 괜찮은데 내가 데리러갈테니까 솔씨는 시간만 얘기해줘요 >
카톡 한 바닥을 다 채울만큼 혼자 쉴 새 없이 글자들을 쏟아냈다
<잠깐만요>
아...너무 몰아쳤구나
나 살자고 숨 쉬고 싶다고 솔을 괴롭혔구나
폰을 잡은 두 손이 굳어버렸다
화면 가득 내 말만 쌓여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 주 안에 넘겨야 해서 다음주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묵직한 회색빛 한숨이 아닌 맑은 햇살이 담긴 숨이 내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번 일 마무리하면 연락드릴게요 식사도 맛있게 하세요>
<네 >
밥밥밥밥밥밥
밥을 먹어야겠다
먹을 것 하나 없는 냉장고
당장 뭐라도 사와야겠다
솔이가 맛있게 먹으라고 했으니까 진짜 맛있게 먹어야겠다
해가 떠있는 시간에 밖을 나가 본 일이 얼마만인지
하늘 색이 파란 색이라더니 저런 색이였구나
나무 색은 초록 색이라더니 이런 색이였구나
세상에 색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솔이 나를 건져냈다 어둠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