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꿈을 꿨다
기억 나지 않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가는 꿈
아무리 달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수렁에 빠진 바퀴가 헛돌며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순간
작은 목소리 하나가 들린다
솔아 솔아 미안해 솔아
항상 반복된다
침대에 널부러진채 반쯤 넋나간 사람처럼 흐르는 눈물과 힘없이 피식거리는 자조적 웃음이 뒤섞여 고요한 방안을 메운다
꿈에서라도 도망이라도 갈 수 있었으면
꿈이라지만 내맘대로 할 수 있었으면
꿈이기에 가져보는 희망이 있었으면
꿈이여서 허망해지는 순간들의 반복을 지울 수 있었으면
꿈 꾼 뒤엔 어김없이 통증이 온다
둔탁하면서도 가늘게 긁어내는 모순적 감각의 발광
원인 모를 통증의 근원찾기를 포기한채 임시방편만 메운다
진통제를 삼킨다 물도 없이
통증이 메마른 목넘김 알약이 지나가는 흔적도 지울만큼 쏟아지니까
얼마전부턴 꿈이 조금 달라졌다
날 부르는 목소리가 또렸해졌다
울먹임과 미안함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절규가 웅웅거리는 소리에서 말소리로 점점 명확하게
찰나에 스치는 눈물 가득한 눈도
꼭 선재같다
아닐거야 아닐거야 그럴리 없어
미움도 고마움도 모두 갖게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뿐
요즘 선재를 자주 만나서 착각하는 걸꺼야
오늘도 출근 시간을 피해 될 수 있으면 눈총 덜 받을 시간에 버스를 기다린다
그마저도 사람이 덜 타는 노선으로 여유버튼이 뜬 버스를 기다리지만
귀찮은 눈빛의 기사님을 만나면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게된다
"내가 아가씨 출근시간 맞출라고 배차순번 바꿨어 내가 전용기사잖어"
유독 내 또래 따님이 있어서 마음 쓰인다던 기사님이 멀리서부터 반갑게 손 흔들며 내리신다
손님들께 양해구하시고 휠체어 안전장치까지 완벽하게 손수 해주시는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한 아저씨
"집에 있지말고 밖에 더 자주나와 아가씨가 나와야 다른 사람도 나올 수 있구 차타고 다니는 게 별일이 아닌 세상이 돼 아가씨가 큰 일 하는거야"
주문처럼 내게 매번 해주시는 말
세상으로 나와라
나를 위해 뒤따라 올 또다른 나를 위해
항상 동정 연민 가득한 눈빛에 싸여있다가
오늘처럼 애정 담긴 말을 들으면 울컥한다
내릴 때가 다가오고 기사님이 승객들께 양해를 구한다
여기저기서 에이씨 하는 불만의 소리들이 귓가에 왜 그리도 콕콕 박히는지
뚱한 얼굴의 청년 둘이 기사님과 함께 휠체어를 밀어 내려준다
마지못해 도와주는 불친절한 친절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다리만 아프니까
그래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오늘도 방패를 몸에 두르고 전쟁터로 나간다
노골적인 시선, 보이지 않는 외면, 격렬한 거부와 싸워가며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선재씨 특혜 받는다고 좋지않은 시선들이 있는거 아시죠? 생각보다 일 잘하셔서 놀랐어요 이렇게만 하시면 다음 프로젝트도 같이 할 수 있겠네요 이번 수정사항도 잘 해주세요 아 참 몸이 불편하신데 회의때마다 자주 나오기 어려우면 줌으로 할까요? 대부분 그렇게들 하던데"
"줌으로 해서 될 내용이면 하죠 지금은 대면 회의가 필요한 단계잖아요 다음에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언제든 연락주세요 "
칭찬인지 배려인지 욕인지 질투인지 뒤범벅된 말만 남기고 획 소리나게 가버리는 부팀장이란 사람
무조건 자기보다 낮을 꺼라고 부족할 꺼라고 얕잡아 보는 사람들 때문에 더 악을 쓰고 버틴다
때론 고맙다 내가 주저 앉지 않게 잡아주는 두 개의 기둥
가족 그리고 편견
이를 악 문다
두 주먹을 불끈 쥔다
퉁퉁 부은 눈을 꾹꾹 눌러 부기를 뺀다
입꼬리를 올린다
가슴을 쫙 편다
세상과 맞서 싸울 새로운 날이 펼쳐진다
"깜짝이야"
회의실 문앞에 쪼그려앉아있다고 하기엔 너무 큰 문짝이 하나 있다
회의실 블라인드 사이로 보려고 온 몸을 구겨 몰래 보고 있다가 다리에 쥐가 낫다며 연신 코에 침바르는 선재
"솔아 맛난거 먹으러 가요 부아앙"
입으로 자동차 엔진 소리내서 뒤에서 신나게 밀어대는 선재가 귀엽다만 지금은 전동이다 안밀려 안밀어도 돼
"솔아 낮엔 눈치보지 말고 당당히 다녀요 오늘은 일때문에 만난거니까 우리 데이트 아니예요 절대 데이트 아니예요"
"누가 뭐라 해요? "
나도 오해 안해 ......오해 하고싶어도 안할거야 ......
아까부터 계속 내 눈치만 살핀다
하고픈 말도 양 볼에 가득하다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 물고 주인 눈치보듯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190 다 되는 덩치가 내 눈치보며 눈만 또르르 굴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할 얘기 있죠? 말해요 다 들어 줄게요"
"정말 다 들어 줄거예요?"
"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뭐든요"
" .....지금부터 내가 뭘하든 아무말 하지 마요 "
갑자기 차 핸들을 꺾고 미친듯이 달려서 고속도로를 탔다
"집에 가야죠 어디가요?"
"다 들어준다면서요"
"말 들어준다했지 일탈을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였어요"
"그게 그거예요"
더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는다
투지에 불타는 황소가 돌격하듯 앞만 보고 달린다
청춘의 일탈은 환호받고 용납될 수 있으나
우린 이미 청춘을 지나고 있다
더군다나 하늘의 별과 땅의 우물이 함께하는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물 속 별은 곧 떠날테니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라도 ....함께이고 싶다
한적한 산 속 호수 경치 좋은 산장
작고 낡았지만 아담하니 예뻤다
"여기 같이 오고 싶었어요 그리고 부탁 하나 더 있어요 둘만 있을 땐 말 놓으면 안될까요? "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모성애 유발하는 표정 다소곳이 모은 두 손
항복
"그렇게 해요"
"솔아 고마워"
덥석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며 아기처럼 신나하는 모습 보니 괜히 그동안 고집 피운 것 같아 미안해졌다
오랜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 걱정하실 것 같아요 아니 같아 집에 가....자"
"이미 허락 받았어 차에 솔이 짐도 챙겨왔어 어머니께서 다 싸주셨어"
엄마 .....고마워😊
오빠의 협박 문자와 감시용 영상 통화가 연달아 왔지만 선재는 눈하나 깜짝하지않고 웃으면서 대답 잘 했다
데뷔 때 에피소드 비방용이라 말 못한 내용들을 무용담 펼쳐놓듯 재연까지하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선재를 보며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마음이 고팠으면 저럴까 짠하기까지 했다
분위기 있게 와인도 한잔 하고 취기가 살짝 오르자 선재의 몸이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내쪽으로
은근슬쩍 어깨에 기대더니 술주정인듯 히죽히죽 웃으면서
선재와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다
내가 걷지 못하는 것이 처음으로 좋았다
부끄럽긴 해도 도망가지 못한다는 핑계로
안겨있을 수 있었으니까
연인이라해도 좋을
연인이 아니여서 씁쓸한
연인이 될 수 없어서 아린
우리의 관계가
점점 알 수 없어진 터널로 들어간다
어느새 선재의 부빔이 점차 멎어간다
새액쌔액 아기처럼 잠에 폭 빠진 숨소리가 듣기 좋다
토닥토닥
조금 뒤 선재의 미간이 찌푸러들며 서서히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게 편안하게 안겨있을때 웅크린 모습과 전혀 다른 두려움에 눌려 점점 숨어드는 모습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깨우려 선재의 어깨를 잡은 그때
"솔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널 놓치지 않았으면 ......나때문에 네가 다쳤어 .....그날 같이 갔어야했어 .....내가 널 제대로 건졌어야했어 잘못 업어서...."
그날? 다쳐? 잘못 업어?
잠꼬대를 하는 선재에게 물었다 잠결에 대답을 해주길 바라며
"선재야 그날이 언제야? 날 왜 업어?"
"너 사고난 날....내가 내가 너무 급해서 막 업고 뛰어서...."
기억에 없었으나 감각으로 남아있던
울먹임에 마구 흔들리던
넓은 등
연신 내 이름만 불러대며 미안하다던
목소리
그 사람이 선재였다
나를 살린
나를 묶은
나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한
꿈속에 그 사람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망의 감정이 쏟아지려는 순간
서럽디 서럽게
구슬피 서글프게 우는
미안하다며 가슴을 부여잡고 버둥거리는 선재
이렇게 괴로워했어?
내가 절규할 때 선재도 자책으로 몸부림쳤구나
내가 살기 싫어 발악할 때 죄책감으로 옭아매고 있었구나
내 몸이 죽어갈 때 네 영혼이 사그라지고 있었구나
너도 지옥을 살고 있었구나
미움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밤이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상자 입구를 틀어막고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진실을 온 힘 다해 흩어내고 있었다
나의 침묵이
선재의 평온을
우리의 평안을
불안한 평화를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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