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빛도 공간도 없는 곳
발 밑에서 검은 연기들이 스물스물 새어나와 다리를 감아 타고 오른다
허리를 감고 가슴을 짓누르고 목을 조르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린다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
뻘 속에 잠기듯
'선재야 선재야
너의 세상은 아직도 밤이니? '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
'선재야 이젠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일어나~'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침전하던 깊이 모를 심연에서 위로 점점 더 위로 나오기위해
살고싶다
살고싶다
살아야겠다
살아야만한다
"헉헉헉...."
땀 범벅 눈물 얼룩으로 헝클어진 모습이 비친다
15년 째 꾸는 꿈
몸부림쳐봐도 발버둥쳐봐도 병원을 가봐도
단 한순간도 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자책에 휘감겨 꼼짝도 못하는 악몽
서랍장을 뒤져 약을 찾았다
내성이 생긴건지 먹어도 잠을 이룰 수 없다
빈 통만 손에 쥔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거실로 나갔다
초점 없는 눈으로 휘청이며 내딛다 넘어지고
일어나려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약 어딨어 약 어디있냐고
코트 속에 넣어둔 생각이 들어 찾는데 보이질 않는다
항상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있는 옷을 뒤졌다
몇번을 놓치고 떨리는 손으로 겨우
주머니에 잡히는 것을 꺼냈다
사탕?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절규하고 울부짖는다
미친 놈처럼 온 집을 헤집고 다니는 내가 싫어지는 순간
모든걸 놓아버리고 싶어지는 순간
솔의 사탕이 나를 잡았다
제발 제발 제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힘을 내서 1번을 눌렀다
오랜시간 비어있었던 단축번호 1번
"살려줘요 제발"
흐릿한 안개 속에서 점점 선명해져 걸어나오는 추억
항상 보았던 익숙한 뒷모습
또 꿈이네
그동안의 꿈과는 조금 다른 건 그 애가 선명하게 다가온다는 거
항상 울고 있던 얼굴이 아니여서 다행이다
꿈에서도 네가 우는 건 싫어
"깼어요?"
나 아직 꿈인가? 약 기운이 돌았나?
도저히 떠지지 않는 눈
아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환각이라도 환청이라도 널 볼 수 있다면 널 들을 수 있다면
소리를 향해 팔을 뻗어 보았다
작은 아주 작은 손이 잡혔다
꽉 쥐었다
잠시만 이대로 모든 것이 멈췄으면
내 손 안에 네 손을 품은
이 꿈에서 깨지 않길
"정신차려봐요 선재씨"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한 목소리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또렷한 향
환상이라해도 좋을 촉감
힘겹게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너였다
점점 눈이 커지면서 두 눈 가득 보이는 얼굴
얼마나 간절히 바란 순간인지
내 품 가득 널 담고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닿아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짙은 안개 사이로 빗물 한 방울이 뺨에 닿았다
"또 울렸네.....맨날 널 울리기만 하네 미안해 솔아 미안해"
"미안하면 정신차려봐요 나 알아보겠어요?"
내 입술이 맞닿아, 아직 떨어지지 않은 ,
또 다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목소리
내 품에 내 입술에 솔이 담겨있다
"........미안해요.....난 꿈인줄 알고......"
"...꿈이면, 꿈속에선 그래도 되는건가요?"
양 볼이 발그레해진 솔이 나를 흘겨본다
기분이 많이 상해보이진 않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눈치만 보고있다.
"어떻게 왔어요?"
"출입키로 열구요"
지난번 코트를 바꿀 때
지갑을 넣어둔 채 줬었는지 지갑 속 전자키로 열고 들어왔다는 말에
순간 그날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온 집안이 엉망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약병들과 알들이 모래알처럼 쌓이고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눈물 그렁한 솔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에 실망했을 것이니
좌절과 절망 모두 까발려진 나신(裸身)의 초라함
내팽겨쳐 나동그라진 나를 소중히 품고 다독이는 네 손길이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다 지났다고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무너져 내린다
상처에 덧난 상처 딱지가 덕지덕지 붙고 곪아 진물이 흘러도 외면한
내 마음에게 미안해졌다
"오늘만 살아요 딱 오늘만
힘들면 그만둬도 되요 언제든.... 대신 오늘은 안돼요......
날 위해서 살아줘요
당신이 날 살렸잖아 날 살게 했잖아
나도 당신 살릴 수 있게 해줘 "
그래서였을까?
새벽이고 낮이고 어느때고
내 연락에 매번 번개처럼 반응한다
동정이여도 좋다
연민이여도 좋다
별일 아닌 듯 익숙한 듯
네게 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내게 네가 숨을 불어 넣어주기 시작했다
일상을 살아가라며 ......
나와 같은 마음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키우기 시작했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 서 있고 싶다
<우리 소풍가요>
<네 기다릴게요 조심히 와요>
이 길의 끝에 나를 기다리는 그 애가 있다
익숙한 일상이 반복되는 평범한 삶에 ,.....
솔의 휠체어 뒷모습만 보는 게 싫었다
십 년 넘게 꿈에서도 뒷 모습만 봤는데
겨우 만난 지금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의 앞에 서서 마주보며 뒷걸음으로 걸었다
넘어진다고 조심하라는 솔의 잔소리가 노랫소리같다
"넘어진다니까요 앞에 봐요"
"솔이가 내 눈이 되주면 되잖아요 내 대신 세상을 봐줘요 나와 함께 봐줘요"
이렇게 준비없이 고백할 생각은 아니였는데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지만 눈치마저 없다
동그래진 눈만 껌뻑이며 멈춰서버린 휠체어 앞에 마주 앉았다
검은 눈동자 뒤 수많은 생각과 수없이 밀려드는 고민이 보인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나의 무모함이 내 이성의 눈을 닫아버린다
이 순간만은 온 세상 모두를 잊고 너만 생각하고 싶다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욕해도 나만 생각하고 싶다
"당장 답을 바라진 않아요 지금처럼만 곁에 있어줘요
내가 질려서, 죽을만큼 미워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지기 전까지.
언제든 보내줄게요 "
"가라는거예요 말라는거예요?"
"가지말라면 안갈꺼예요?"
어둠이 한숨마저 숨기고 나를 삼키려는 파도에 휩쓸릴 때
무지개가 하늘 가득 피었다
너와 나 빛의 스펙트럼이 감싸고 있다
이제야 살 수 있다
살려줘서 고마워 솔아
살아줘서 고마워 솔아
살고싶어 사랑해 솔아
"아직 대답 못들었어요 빨리 대답해줘요"
놀이공원 풍선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마냥 떼를 썼다
평소엔 안사주던 풍선도 놀이공원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들고다니며 자랑하니 나도 졸라서 하나 얻어들고 기뻐하던 그때처럼
한참을 머뭇거리던 솔의 입이 살짝 움찔거렸다
"선재씨가 날 두 번이나 살렸으니까 나도 한 번은 살려줄게요"
"두 번이라뇨?"
"......저 알아요 그때 사고나던 날. 물에 빠진 날 구한 사람....."
가장 두려웠던 순간
숨겨왔던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졌다
내 천국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1 https://theqoo.net/dyb/3288541535
2 https://theqoo.net/dyb/328954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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