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햇살이 창을 두드린다
새 소리가 반갑다며 창 사이로 스며든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가슴 가득 담긴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내 무릎을 베고 잠든 널 눈에 담고 싶어서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혼자 참아냈던 걸까
처음 만났던 날
선재의 눈빛
내게 끊임없이 말하던
차마 말하지 못하던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때론 침묵이 진실이 될 수 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이 순간을 나만 홀로 지켜본다
끝을 아는 시작
그래도 내 인생 처음으로 욕심 부리려한다
내 다리 대신 준 선물이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받아내련다
인어공주의 어리석음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다리 대신 목소리만 잃은 것이 아니였다
왕자의 사랑 그리고 자신의 미래 모두를 잃었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나는 나는 다를 것이다
"선재야 일어나 아침이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선재의 뺨에 촉 입을 맞춘다
순간 커져버린 선재의 눈
한참을 껌뻑거리기만 하던 선재의 두손이 내 뺨을 살포시 잡는다
서로의 숨을 나누며 곧바로 터진 웃음에 깊이 숨어있던 한숨을 끄집어냈다
앞으로 네게 맑은 숨만 줄게
"솔아 꿈이지? 네가 내 앞에 있는 것도 꿈같아 네 웃음을 볼 수 있어서"
"선재 네가 찾아준거야 고마워"
선재의 양팔이 내 몸을 으스러지도록 꼭 끌어안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긴장과 경계심이 완전히 풀어진 내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행복해한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산장을 무너뜨릴 듯 울리는 전화의 진동
통화 버튼을 누룸과 동시에 머리를 때리는 번개가 쏟아졌다
예상했던 일
우리의 일탈을 세상은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텐데
지구의 공전이 곧 계절을 바꾸고
땅의 우물 속에 별이 머물 시간도 점점 앗아갈텐데
"솔아 나 믿지? 내가 다 책임질게. 약속해줘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손 놓지 않기로. 곧 기사 다 내려갈거야 조금만 참으면......"
속으론 몇 번이고 외쳤다 나도 네 손 꼭 잡고 싶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아니. 여기까지예요 고마워요 내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줘서.... 선재씨 마음 간직할게요 "
내가 선택한 침묵과 거짓말의 댓가
선재의 반짝임을 볼 수 있게 된 것
다시 처음처럼. 멀리서..
우물 속 별은 빛을 잃었고 우물은 다시 어둠만 품었다
이게 맞는 거라고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선재의 마음을 나눠가졌으니까
지난 15년 선재의 말로 살았으니
앞으로 평생 선재의 맘으로 살 수 있다
세상은 신기하리만큼 우리를 금방 잊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버텨볼 걸 그랬나 싶다가도
내가 어둠 속에 숨었기에, 흥미를 잃은 하이에나들이 돌아간 것이기에
한바탕 울음으로 씻어보냈다
"살려줘요 제발"
선재의 절규가 전화를 타고 심장에 꽂혔다
잘 견디길 버텨주길 바란 것은 내 욕심이였을까
너를 위한 내 선택이 다시 널 구렁으로 밀어 넣어버린 것일까
집안 단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다
뒤집어진 러그, 깨진 스탠드, 쏟아진 약통, 튀어나온 약 알알이 뒤섞여 바퀴 사이사이 박혔다
바퀴를 아무리 돌려도 헛돌기만 할 뿐
거실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울고 있는 선재가 보이는데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
기었다
양팔에 유리가 박히고 다리가 긁혀 피가 나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울고있는 선재에게 가야한다는 생각만 머리를 채웠다
나 따위가 뭐라고
내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는 선재의 울부짖음에,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겨우 몇 미터 앞인데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끝에 선재의 손이 닿았다
기나긴 마라톤 후 시원한 물 한잔 들이킨 것 같은 안도감
붉게 충혈된 눈 땀 범벅 헝클어진 머리 넋을 잃고 나동그라져 맹수의 포효같은 울음을 뿜어내는 선재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살려줘 제발 솔아 나 좀 살려줘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선재야 나 여기있어 정신차려봐. 나야 나 솔"
내 목소리가 선재에게 닿았을까
성난 파도 치던 바다의 잔인함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온몸으로 울던 선재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솔아 죽고 싶어 ..너 없이는 ......"
"오늘만 살아 딱 오늘만,
힘들면 그만둬도 돼요 언제든.... 대신 오늘은 안돼요......
날 위해서 살아줘요
당신이 날 살렸잖아 날 살게 했잖아
나도 당신 살릴 수 있게 해줘 "
내 간절함이 선재의 울음을 잡았다
날 품에 안고 터질 듯 꽉 안아주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내 입술 위로 선재의 입술이 닿았고 거친 숨이 휘몰아쳤다
검은 구름이 끝을 알 수 없이 뿜어져 나왔다
시간의 흐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내 품에 내 안에 선재의 숨이 이어져 있는 것만이 중요했다
"또 울렸네.... 맨날 널 울리기만 하네 미안해 솔아 미안해"
"괜찮아 다 괜찮아 너만 살아있으면 돼 난 얼마든 울어도 괜찮아
비어있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채웠다
"나 알아보겠어요? 선재씨"
다시 한 발짝 거리를 두기 위해 존댓말로 선재를 불렀다
다정히 네 이름을 부를 수는 없지만
네 곁에 있어야겠어
나도 살아야겠어
새로운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세상을 속이기로
아니 기만하기로
물어 뜯으려면 뜯어봐라
그럴수록 오기만 독기만 품을테니
지난 15년도 편견 차별 속에 살았는데
비웃음 조롱따윈 콧방귀 끼며 견뎌줄테니
첫사랑은 실패했다
남들의 이목에 두려워 숨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랑은 피우겠다 아니 쟁취하겠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 공주
그럼 글자를 배워야지
손짓 발짓으로 표현해야지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야지
나의 침묵은 더이상 외면이 아니다
도저히 나도 감당할 수 없는
내 사랑을
네 사랑을
우린 하나일 수밖에 없다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김선우의 <낙화, 첫사랑>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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