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로 인해 어둠이 시작되고 너로 인해 빛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진 현실을 넘어서
레테 망각의 강물을 건너는 나에게
너는 꼭두서니빛 새벽 하늘의 아름다움으로 절망을 삼켜간다
발끝이 타오른다
움직이고 싶다는 욕망이 거짓 감각을 일으키고 있다
헛된 꿈인줄 알지만 한번쯤은 보여주고 싶다
굳어버린 두다리가 절대 족쇄가 아니였음을
너에게로 가기 위한
너와 발을 맞추기 위한 신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별히 너만을 위한 선물이니까 기대해"
예나 지금이나 천방지축 도깨비같은 예측 불가 태성의 행동은 한결같다
가끔은 일탈의 표상처럼 보이던 모습이 부러워서 동경이 관심으로 애정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먹고 문득문득 떠올랐던 태성의 정형화되지 않았던 모습이 그립기도 했지만 내가 다시 휘말릴지는 몰랐다
"어디 가는건지 알려줄래? "
"알려주면 가고 안 알려주면 안 갈거야? 그냥 오빠만 믿어"
새벽 3시도 넘은 시간 번화가의 화려한 불빛도 소음도 모두 잦아든 어두운 도로를 달려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영업시간은 한참 지났을 시간 대형 쇼핑몰 지하 주차장 미로처럼 엮인 통제 구역으로 한참을 들어갔다
숨소리가 하울링을 일으킨다는 착각이 들 만큼 생명체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쌓인 곳을 태성이 이끄는대로 가고있다
"어디가는거냐고? 여기 영업시간도 아닌데 어떻게 들어가?"
"잠자코 따라와"
누군가와 통화 후 후레시 불빛을 따라 또 한참을 갔다
탁탁탁
어둠에 익숙해 있던 눈에 빛이 강하게 쏟아진 눈부심을 이겨낸 눈앞에 환상이 펼쳐져있다
선재다
"오고 싶었을거잖어"
사람들 시선때문에 숨어드는 나를 위해 선재 팝업 행사장에 몰래 데리고 와준것이다
철거시간을 조금 늦춰서 특별히 준비했다며 어깨 으쓱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팬카페에 올라와있던 영상 속 사진들 전시물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구석구석 구경도 하고 전문 사진사처럼 여러 포즈를 요구하는 태성이 덕에 사진도 찍었다
마음 한구석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안고 얼굴만 웃으며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온전히 즐길 수 없는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다 봤으면 이제 가지?"
낮게 깔린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수리를 쿡 찌른다
성큼성큼 평소보다도 더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선재의 모습
항상 나를 향해 연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서리를 뿜어내는 하늘의 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
"고맙다는 말을 참 껄쩍지근하게 하네 남자답게 시원하게 하면 덧나나?"
태성이가 뭐라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와서 나를 확 돌려 나가다 한숨 한 번 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 날렸다
"솔은 내가 연예인이라 좋아하는게 아냐 어떤 모습이든 다 좋은거지 나라서..... 솔의 선택이 중요한거야 넌 솔의 마음을 어림짐작으로 이곳에 오면 좋아할거란 너만의 착각으로 뭉개버린거야 그게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면 넌 자격 없어"
이성의 힘으로 분노를 억누르는 선재의 두 주먹에 들어가는 힘이 휠체어 전체를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배고프다 라면 먹을래?"
부엌에 들어가 달그럭거리며 냄비를 찾는 선재를 따라가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한참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선재가 몸을 낮춰 미안한 듯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솔아 미안해 나도 생각 못한 걸 김태성이 해줬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서 앞뒤 없이 쏟아냈어 정말 미안해"
"아냐 네 말이 맞어 난 더 감동 받았어. 내 선택을 넌 이해하고 지켜주려고 했다는거니까.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라서 고마워"
나도 가보고 싶었지만 그건 해선 안되는 일인걸 알기에 참았다 이정도는 선재를 선택한 결정으로 감수 해야하는 일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을 사소한 일이기에 크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선재는 아주 작은 서운함도 놓치지 않고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선재야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다 이야기 할게 혹시나 네가 오해할까봐 마음쓸까봐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그게 내 실수인 것 같아"
"때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서로가 배려한다는 행동이 더 오해를 일으키고 내 마음을 네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몰라. 우린 그러지 말자 그러기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놓쳤어"
고요함이 흐르는 선재 품에서 도리어 난 위안을 얻고 있었다
선재라는 나무의 그늘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거란 확신이 들었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어느 누구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선재 얼굴 눈코입 하나 하나 뜯어보는데 조각도 이런 조각이 없다
거울에 비친 나는 못난이인데
영상 편집 하다말고 화면을 멍 하니 턱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엔 나와 똑같은 자세를 하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멍뭉이 한마리가 있다
"선재야 난 너무 못생긴 것 같아"
"아냐 솔아 아름다워
넌 언제나 네가 아름답다는 걸 보여줬고
내가 항상 널 아름다워 한다는 걸 알잖아
이쯤되면 내 판단을 믿어줘야 할 때야 넌 내 최고의 선택이야 "
헐......내 인생 최애! 연예인 말고 진짜 내 인생 날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선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다니 ㅠㅠ
세상 사람들 부럽죠? 선재 최애가 나래요!!!
아기가 첫걸음을 떼고 당당하게 자랑하는 듯한 눈빛의 선재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솔아 대본 연습 도와줘"
"내가 그건 자신있지 내 꿈이 감독이였잖아 디렉 완벽하게 해주겠어"
대본 20 여권을 들고 와서 연습하자는 선재를 보며 오늘 잠 다 잤다 싶었다
한번 불 붙으면 쉬는 시간 없이 몰아서 에너지를 다 쏟아버리는 열정이 다시 솟아올라서 요즘 대본을 계속 받아 보는 중에 딱 꽂힌 작품 리딩을 완벽하게 해보고 싶다며 며칠전부터 조르고 조르던 일이였다
목소리 변조까지 해가며 정말 열심히 최선 다해 대사를 맞추었다
간만에 선재의 눈이 반짝이고 몸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나 역시 마지막 남아있는 힘이라도 쥐어짜서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서너번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레 대사도 다 외우고 동선도 짜면서 나도 일부가 된 듯 몰입해가고 있었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 여러 감정을 하루에 몰아 찍는 환경을 알기에 수십권의 대본을 거실 가득 늘어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감정의 폭풍에 휩쓸리고 있었다
몰아치듯 쏟아내던 선재의 입에서 얕은 한숨과 함께 불안한 시선이 대본에 꽂혀있다
< '그' 그녀와 잠시 마주친 시선에 순간 순간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녀'를 향해 한 발 내딛는다 기억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기 위해.
'그녀' 천천히 뒷걸음치며 '그'와 거리를 점차 벌리며 굳은 시선을 땅으로 쏟는다 '그'라는 기억을 지워내려 애를 쓰듯>
"다른 편 보자"
내 손에서 대본을 획 낚아채며 바닥으로 탁 던져버리지만 이미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을 통해 마음을 읽었다
우연인걸까 필연인걸까 운명인걸까
오랜시간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머리를 통해 세상에 보여질 준비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선재를 통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자, 기억을 감추는 자 그 두 가지 모두 알고 있는 선재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생명을 얻어 세상으로 날아가려한다
"선재야 만약에 너가 이 주인공이라면 기억 꼭 찾을거야? 나라면.... 그냥 둘래. 아니 기억이 나도 모른척 할래"
생각지도 못한 내 말에 놀란 표정의 선재와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다른 방향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잖아. 모든 기억은 자기중심적이야 분명 같은 기억인데 누군가에게 좋은 추억으로 상대에겐 나쁜 기억이라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잊혀지면 잊혀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지않을까? 운명이 둘을 휩쓸어버리려 한다해도 .....그게 내 나름의 신에 대한 마지막 저항일지도 모르니까"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그래서 난 그사람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그게 너라서 ....
너무 선명히 너라서 .....
네가 원하는대로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
"15회 대본 안봤지? 그거 해볼까?"
어색함을 풀어보고 싶어서 옆에 있는 대본 아무거나 들어서 흔들었다
피식 웃으며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자고 한거야"
< 오래된 기억 속 흐릿한 실루엣이 '그녀'였음을 확인한 순간
'그' '그녀'의 숨을 온통 빨아들이듯 강렬하게 입을 맞춘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렸다
오랜 그리움을 풀어내듯 밤새 숨가쁜 탄성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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