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사이 반짝이는 여우비가 달려온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파란 하늘 사이로 방긋 웃으며 달려온다
오늘같은 날의 여우비는 예쁘지만
참 슬프다
여우를 사랑하는 구름이야기
해를 좋아해서 양지바른 곳에 꼬리를 베고 잠든 여우가 눈부셔 찡끄리는 것이 마음쓰여 구름이 손끝으로 살짝 가려주었다
눈부심이 가라앉자 편안한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든 여우를 보며 행복했던 구름
잠에서 깬 여우는 햇빛을 가렸다며 구름에게 투덜거리며 콧방귀 뀌고 굴로 들어가버렸다
구름의 마음도 몰라준 채 ....
여우의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여우의 커다란 눈이 감겨있을 때에도
구름은 한결같이 여우를 감싸고 있었다
여우는 한번도 구름을 봐주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구름은 좋았다
여우를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날이 오기 전에는
시끌벅적 산마을이 들썩거리고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린다
구름은 고개를 내밀어 구경을 나갔다
왁자지껄 웃음 소리 속에 여우가 웃고 있다
쪽두리에 연지곤지 수줍은 미소를 띄며...
여우가
구름이 사랑한 여우가
시집을 간다
여우를 떠올리며 행복함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하얀 구름 얼굴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여우가 햇빛때문에 눈이 부셔 뜨지 못하자 언제나 그랬듯
구름 한자락 내밀어 여우에게 손그늘을 드리웠다
여우가 편안하게 웃으며 시집가라고
구름은 여우를 떠나보내며 마지막까지 사랑을 담아 보냈다
아주 잠깐
아주 조금만 울자
여우가 지나간 뒤에서
우산 없는데 비온다는 일기예보 못들었는데 어쩌지?
비가 싫은 건 아니지만 우산 없이 맨몸으로 맞는 건 좀 그렇다 어쩌지?
드라마에서는 멋진 남자가 우산 들고 짠 하고 나타나던데 나에겐 그런 일이 생길 일은 없겠지?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면 달려야한다
으차
퍽
아야
길 한가운데에 전봇대가 있을리는 없구 뭐지?
눈에 보이는 발을 쭉 따라 올라가보니
우와 잘생겼다
비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모르겠다
눈이 너무 부셔 떠지지 않는다
반쯤 겨우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너 왜 울어?"
응? 나 울어? 왜 울어? 안 우는데?
왜 나보고 우냐고 묻는 거지?
그런데 나에게 말을 거는 그 아이의 눈이 촉촉하다
"그러는 너는 왜 우는데?"
내 질문에 답은 하지 않는다
우산을 내게 기울여줄 뿐
"네가 비 다 맞잖아 똑바로 써"
"내가 다 막아줄게 지금처럼만 내 앞에 있어주라 "
알 수 없는 말
그 아이의 눈을 잊을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왜 이러지? 왜 눈물이 나는거지?
당황해서 어찌 할 바 모르는 그때
무심한 듯 옆에 서서 가려준다
내 눈물이 다 그칠 때까지
훌쩍 훌쩍
"다 울었어?"
"응"
"아무데서나 울지 마 내 앞에서만 울어"
"...왜?...,"
"너 울 때 예뻐"
...꿈이다
생생해서 꼭 현실 같은...
"선재야 꿈에서 널 만났어 네가 내게 우산을 씌워 주었어"
잠에서 깨지도 못해 목이 푹 잠긴 채 웅얼거리며 말을 건넸다
다정한 목소리가 스며든다
"내가 그랬어? 그리고?"
"울었는데 나도 너도 둘 다"
선재 얼굴을 보려고 눈을 살짝 뜨는 틈새로 보이는 것
선재의 커다란 손
잠자는 내 얼굴 위 비치는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한참을 쫑알거리며 선재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말없이 듣던 선재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꽁하고 때린다
"바보야"
"왜 내가 바본데?"
"꿈 아냐"
어제 밤에도 선재는 촬영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침에 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어와서는
내게 팔을 내어주고 해를 가려주며 꿈 꾸다 울어버린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는 여우를 뒤에서 한없이 지켜보던 구름
바보같은 여우는 나
우직한 구름은 선재
여우비 이야기는 현실이였다
지금 이순간마저도 날 배려하는 선재의 너른 품에 안겨있으니
"우리 얘기 한 적이 몇 번 있었어"
"언제?"
"너 김태성에게 첫 고백 실패한 날"
에이씨 하필이면 그날일게 뭐람
여우비를 맞고 서 있던 내게 우산을 건네주었던 날
김태성에게 첫고백 까이고 속상하고 창피해서 나를 달래는 현주 말도 듣지 않고 마구 달려가다 부딪힌 남학생
안그래도 서러운데 울고싶은 걸 딱 건드려준 그 애에게 화풀이 해버렸다
학교 운동장에 서서 서럽게 울어버렸고
당황한 그애가 내 손을 잡고 기념관 뒷 마당으로 데려갔었다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울었다
진짜로 쏟아지는 콧물을 닦으라며 무심히 건낸 손수건에
흥 소리 내며 코 풀고 더 서럽게 울어버렸던 내 흑역사
그 역사적 쪽팔림의 순간
19살 선재와 솔이 만난 적이 있었다
"악!!그게 선재 너라구?"
"응 그날 너 우는거 보고 김태성 죽일뻔 그리고 나도 죽을뻔"
"넌 왜 죽어?"
"우는 네가 너무 예뻐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귓까지 발그레해져서 어쩔 줄 몰라 몸을 베베 꼬며 부끄러워하는 190덩치를 보며 감탄했다
나도 기억 못하는 나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너라서 고맙고 미안해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는 말처럼 때마침 김태성 전화가 왔다
선재가 내 폰을 건네 주지 않고 입을 삐죽이며 재수없어 궁시렁거린다
한도 끝도 없이 나온 입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고 폰을 뺏어들었다
침대 위로 행복해 죽겠다는 듯 뒹구는 선재를 말리며
본시네마 회의실에 김태성과 마주앉아 있다
회의실에 있지만 또 지난번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오늘은 별일 없이 회의가 끝나기만을 속으로 바란다
"지난번 급작스런 촬영에 협조해줘서 고맙고 감독님의 돌발 행동에 사과드립니다 여기까진 본 시네마 입장
인간 김태성 입장은 그날 류선재랑 또 싸우는 줄 알았다 식겁했다"
"싸우다니?"
"네 첫고백 깐 날인가 다음날인가 류선재가 밴드부 연습실 와서 너 울렸다고 욕하고 싸웠어 인혁이가 말리느라 고생 좀 했지"
"헐...진짜였어?"
"그러고 그때였지? 네가 매일같이 쓰던 편지가 뚝 끊겨서 네가 나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류선재가 연습실 매일 와서 네 편지 빼돌리다 싸운 것도"
"왜 말 안 했어? "
"말 할 이유가 없지 너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말하는건 그사람에게 가라는 말인데 미쳤냐 그 말을 전하게? 그날이 계기가 되서 네게 관심 생겼구 그 다음에 네가 고백 또 하길래 사귄거지 운동부 류선재가 좋아하는 애는 어떤 애인가 궁금하더라구"
오늘도 또 한번
내가 모르던 그때의 나를
묵묵히 지켜주던
바보같은 여우를 사랑한 구름이
항상 곁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번만 뒤돌아 봤더라면
고개 들어 올려다 봤더라면
선재를 만났을 수도
이렇게 돌고 돌아 아픈 상처를 가득 안고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선재 서재 책장 한켠에 있던 상자들
하나는 내 이름표가
또하나는 내게 썼으나 전해지지 못한 선재의 편지
그리고 내가 김태성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담겨있었다
유치하게 노래 가사를 개사해서 태성이 쪼아쪼아 아주 혀짧은 소리로 오두방정을 떨어놨다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서 뽕하고 사라졌으면 좋겠다
"얼굴 터지겠다"
언제 들어왔는지 내 행동을 소리 없이 지켜보던 선재가 놀린다
"왜 남의 편지는 훔쳐서 가지고 있어? 이거 절도야 절도"
"절도가 문제겠어? 내 첫사랑이 딴 놈에게 정신팔려있는데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김태성이 지금도 네 옆에 있는게 싫어"
"그래서 김태성만 보면 천년의 분노가 솟아오르는거야?"
말만 했는데도 선재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내버려뒀다간 팔뚝 혈관이 다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쪼르르 달려가서 선재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선재야 ~~자기야 ~~여보야~~ 사랑해~~"
"헙! 심장이 ! 숨이 안 쉬어져"
인공호흡이 필요하다며 이때다 싶은지 달려드는 선재
평소같으면 피하거나 째려봤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목을 끌어안은 채 진하게 입을 맞췄다
당황함을 굳어버린 온몸으로 표현하는 진짜 투명한 선재를 보며 다짐한다
절대 내가 널 지켜
지금까지 내가 네 사랑으로 살아 왔다면
앞으로는 네가 내 사랑으로 살게 할거야
달려들어 미친듯이 선재의 온 얼굴에 뽀뽀 폭탄을 쏟아냈다
잠시잠깐 머뭇하던 선재의 돌변한 모습
착하디 착한 구름은 사라지고
어느새 늑대 한 마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순간만은 나도 늑대가 되리라
선재의 목을 더 강하게 휘감고 진하게 키스를 했....
흠. . . . .
우리 앞에 널부러진 저 진상을 어찌할까?
밤새 주류광고를 찍고 취한채 우리집으로 쳐들어온 백인혁때문에 좋은 분위기 다 망쳤어
성질난 선재가 발로 마구 밟고 있어도 실실 쪼개며 얼레리꼴레리 놀리는 백인혁 얼굴에 확 욕한바가지 쏟아내고 싶은 걸 참는다
"솔아 선재가 김태성 왜 싫어하는 줄 알어? 가수가 된 이유가 뭔지 아냐구~"
이건 또 뭔소리?
급하게 인혁의 입을 막는 선재
술취한 취객의 막강한 힘을 이기긴 역부족이었다
"축제때 김태성이 기타치는거 보고 네가 뿅간거 보고 열받아서 노래한거야~ 고3 가을 축제때 무대 서겠다고 연습도 했었다~ 끝내 무대도 못서고 솔이 넌 공연도 못봤지만.....그때 선재 많이 울었다...그렇게 쳐울던 자식이 결혼을 했어요 그것도 그 첫사랑이랑 ....쳐다만 보던 몰래 훔쳐만 보던 첫사랑이랑 기적이야 기적....."
잠들어버린 인혁이 던진 돌덩이가 첨벙 소릴 내며 고요한 연못 한가운데 떨어졌다
가수가 된 것이 나때문이라고?
소나기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놀라긴했지만...,.
"만약 네가 내 노랠 듣고 있는 줄 알았으면, 내 팬인 줄 알았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공백기 없이 계속 앨범도 내고 활동했을지도..."
다시 만난 날 밤
내가 팬이라고 했던 말에
반짝 불 들어오던 눈빛이 떠올랐다
삶의 희망을 다시 피워보려던 것이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내 소나기 노래가 널 찾아준 것 같아 처음 너로 인해 시작됐으니 마지막도 함께하라고"
19살 선재는 저런 눈빛이였겠구나
항상 나를 저렇게 예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겠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39살의 선재도
49, 59, 69, 79, 89,99살의 선재는 볼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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