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 다섯번째 촬영
달달하고 알콩달콩한 연인의 오후
공원에 앉아 별 이야기도 아니지만 둘은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웃음 가득한 장면
그러나 선재의 얼굴은 살짝 굳어있다
원래 키스신 베드씬 히든씬을 찍는 날은 최소인원 투입으로 배우의 감정선을 지켜주는데 오늘은 조금 예외다
동석과 차안에서 촬영장 감독님의 컷소리가 나길 기다린다
"임솔씨 저 현장에 올라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좀 ...."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가는 동석의 뒷모습에 계속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해가 어둑해지고 살수차가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두 남녀의 빗길 교통사고 장면
나역시 아무리 진정시켜보려해도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다
옷으로 담요로 계속 둘러싸봐도 발끝부터 밀려올라오는 공포를 지우긴 쉽지 않다
'영화다 모두 허구다 거짓이다 상상이다 환상이다 '
아무리 되내어도 거친 숨만 내쉰다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그날의 암흑같은 공포가 다시 뒷골을 당기며 목을 졸라온다
컷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요란하게 울리던 빗소리가 갑자기 그치며 찾아온 적막
뒤이어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선재가 동석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온다
"솔아... 솔아....."
"응 선재야 나 여기있어...."
온 힘을 다해 선재의 몸을 꽉 끌어 안았다
감각 과부하로 인한 흥분이 온몸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사라지길바라며
나의 트라우마를 누르기 위해서
동석이 우리 둘을 담요로 돌돌 싸주고 차안의 커텐을 쳐서 단 한 줄기의 달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켜주었다
"하......"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소리가 선재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자 긴장이 확 풀리면서 내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선재가 으스러질 정도로 날 안아주었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포옹의자가 되어 상처를 다독였다
감가 과부하가 일어날 땐 주변에 틈이 좁은 곳에 들어가게 하거나 뒤에서 안아주며 예민해진 감각을 더 강한 압박으로 눌러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압박의자가 되어주고 있다
며칠 전 동석의 부탁이 있었다
"형이 이유는 말 하지 않는데 비오는 날이면 무척 힘들어해요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건지.... 비오면 악몽도 더 꾸고, 그런데 임솔씨 만나고는 비오는 날도 제법 잘 보내요. 임솔씨가 형에겐 치료제인가봐요. 옆에만 있어줘도 좋겠지만 병원에서 포옹의자라는 압박 방법이 감각 과부하때 도움이 된다고 했어요 그날 와서 형 좀 챙겨주세요"
부탁을 받았지만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위로였다
교통사고 장면은 드라마 뉴스 책 가릴 것 없이 보지 못한다
그날을 떠올려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가 끊어질듯 아파오고 미친년처럼 울다 웃다를 반복하게 하기에 ......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려했다
시나리오 작업 중에도 양해를 구하고 빠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선재가 그 장면을 찍는다
무너지고 부서지다 날 잊어버렸던 널 지워버렸던
그때의 나를 ......
정신을 잃어가는 그 순간
서럽게 울며 미안하다고 내 이름을 부르던 선재인데
내 몸이 부서질 때
선재의 영혼은 죽어가던 그 순간을 되살려야한다
"다 끝났어 이젠 괜찮아질거야 내가 옆에 있을게"
"뭔가 바뀐 것 같지않아? 선재야?"
분명 시작은 내가 안아주는 것이였는데 어느새 선재 품안에 꽉 묶여있다
아직 텅빈 검은 눈에 별이 빛을 되찾기도 전
흐릿하게 내 얼굴이 비치며 조금씩 초점이 맞아들어간다
다행이다
선재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이제서야 나도 숨을 쉴 수 있다
창백한 얼굴빛이면서도 입술이 움찔거리머 내 입술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인다
"형 저 여기 있어요 오늘은 차에서 자야하나 했더니 숙소 가도 되겠죠?"
"숙소? 왜? 솔이 있어서 숙소 가면 안돼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구?"
"그러게요 형 진정 빨리 안되면 밤새 둘만 둘 수 없어서 차에 같이 있어야하는데 뒤에서 쪽쪽 거리면 저 가슴에 품은 사직서 냅니다"
담요 틈으로 본 동석의 뒤통수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어 ..어? 솔이 잔다 아이고 벌써 자네 봐봐 코 곤다 너 혼자 숙소 가서 자 우리 아무짓도 안할거니까 어서 가"
"믿을 놈을 믿지 형 못믿어요 특히 임솔씨 일은 더더욱!"
내 입을 꼭 막고 아무말도 못하게 하더니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있는 선재를 보니 안심이 된다
"동석씨 가까운 기차역에 데려다 주세요 첫차 곧 오니까 그거 타고 가면 돼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아침 일찍 또 촬영있잖아요 동석씨도 맘 졸였는데 좀 쉬어야죠 역만 가면 쉽게 움직일 수 있어요 거기까지만 해주세요"
기차 안에서 보이는 해오름을 보며 웃었다
꼭두서니빛 붉은 새벽녘이 또렷한 해오름으로
우리의 삶의 어둠에서 아침으로 옮겨감을 느꼈다
혼자일 땐 막막했던 어둠이
둘이 되니 점차 희미해지고
먼 훗날 그리워할 머나먼 기억 너머 티끌이 되어갈 것이라 믿는다
<솔아 도착했어?>
<응 지금 집앞이야 푹 쉬고 오늘 촬영도 잘해>
<그래 꿈에서 만나 내 옆자린 네 자린 거 잊지 말고 항상 난 솔 너밖에 없다 너밖에 안보인다 >
닭살 돋는 말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하는 선재를 볼 때마다 놀란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네게 가시 돋힌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됐을텐데 미안해진다
잠깐
오늘 촬영?
베드씬....
애국가 부르자
너도 나도 도닦는 마음으로
질투 안 날 줄 알았는데 쉽지 않네
연습때보다 더 잘하기만 해봐라 가만안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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