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는 둘다 나약하고 책임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둘은 사랑을 했고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능력이라곤 없던 사람들이 결혼해 애를 둘이나 낳았다.
30대가 훌쩍 넘어 딸을 보게 된 아버지는 처음에는 애가 예뻐 미쳤고 엄마도 그에 호응해서 나름 가정이라는 게 굴러간듯 보였지만 천성이 한량이고 순간의 즐거움을 좇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남자와의 결혼이 평탄할리는 없었다. 엄마는 쉽게 나를 포기했고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왜인지 또 동생을 낳았다. 파탄이 날 것 같은 결혼생활에서의 마지막 승부수였을까? 부모님은 내동생을 가지고서도, 낳고나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고 결국 내 나이 5세, 동생 나이 2세에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집을 완전히 떠나버리면서 결혼생활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아빠의 남동생, 당시 대구에 자리를 잡았던 작은아빠네로 향했다. 몇날 몇일 그 집에 머무르다 목욕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 자매는 그렇게 몇 일 차이로 엄마에게 버림을 받았다. 당장 딸 둘을 기르기엔 벅찼던 아빠는 동생을 작은아빠네에 맡겨뒀고 동생은 얼마간 작은엄마가 엄마인줄 아는채로 자랐다. 나는 사정이 더 안좋았는데 근처에 살던 고모네를 전전하다 결국 시설에 맡겨졌다고 한다. 아빠는 나를 시설에 맡겨뒀다 한달에 한두번 외출 형식으로 데리고 나오기를 반복했고 그런 꼴을 보다못한 작은아빠가 아빠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대구로 이사를 시켰고 그렇게 아빠와 나, 동생은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
아빠는 작은아빠덕에 일자리도 얻고 회사가 제공하는 사택-작지만 방이 세개나 되는 저층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본인 술마시고 밖에서 허세 부리고 다니는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아이를 기르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었다. 아빠는 양육을 위한 방법으로 여자를 데려왔고 나는 미취학아동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총 세명의 새엄마와 그보다 많은 숫자의 새엄마 비슷한 어떤 사람들이 집에 머물다 떠나는 것을 경험했다. 다행히 나는 눈물이 많았지만 쾌활한 편이었고 씩씩하게 성장했다. 항상 친구든 지인이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다가도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어 착한아이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가정환경 치고는 어른들 표현대로, 삐뚤어지지 않고 잘 컸던 것 같다. 이건 어찌보면 우리를 꾸준히 들여다보고 챙겨주신 작은 아빠네의 도움이 컸다. 6남매 중 유일하게 성공 비슷한 걸 하신 작은아빠는 물심양면으로 나머지 형제들을 챙겼는데 우리도 그덕을 꽤 보았다. 특히 나이가 비슷했던 사촌들이랑은 친남매처럼 지냈고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첫 생일파티도, 첫 피자도, 첫 치킨도, 첫 패밀리레스토랑도, 첫 영화관도 전부 작은아빠 덕에 경험해 보았다.
아빠는 내가 중학생 때 이후로는 여자를 데려오지 않았고 같은 회사 사택건물에 살던 고모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그럭저럭 키워냈다. 내가 스스로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된 고등학교 이후로는 작은아빠의 도움으로 꽤 괜찮은 아파트형 빌라로 이사도 갔다. 내가 그때까지 살았던 집중에 제일 좋은 집이었다. 중간보다는 제법 괜찮은 성적이던 나는 형편상 당연히 서울로 갈 수는 없었고 대구에 있는 모 대학에 입학했다. 등록금이 비싼 학교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15년 가까이 회사생활을 했음에도 내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 줄 돈이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게했다. 나는 수능을 마침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녔고 그때 아빠가 15년을 넘게 다닌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 일자리를 잃은 아빠는 또 삼촌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해보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갔고 나는 대학교를 다니며, 알바를 하며, 고등학생이던 동생을 챙기는 생활을 이어갔다. 나는 무의식중에도 아빠의 사업이 잘 안될것임을 알았지만 아빠는 내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큰 돈을 말아먹었다. 도시가스비나 전기세, 관리비가 미납되기 시작했고 단전이나 단수도 경험했다.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알바를 늘려 고3이던 동생을 케어했지만 아빠는 결국 살던 집까지 말아먹고 잠적했다. 잠적이래봤자 우리 전화를 받지않고 고향에 머무르며 우리를 작은아빠에게 떠넘기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 나이에 다시 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결국 작은아빠의 도움으로 나와 동생이 다닌 대학교앞의 작은 1.5룸으로 이사를 했고,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힘든 대학생활을 보냈다. 우리 자매는 내가 대학졸업때까지 명절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아빠의 고향에 내려갔지만 아빠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대학을 겨우 졸업한 나는 수많은 이력서를 낸 끝에 서울의 모 중견기업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합격을 했다. 예체능쪽으로 다시 대학을 가기를 희망했던 동생의 뜻도 더해져 나는 서울 본사직을 지원했고 우리 자매는 단돈 500만원을 들고 대구를 떠나 서울의 작은 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자매는 부모처럼 살기 싫어 부던히도 노력했다. 나는 적은 월급으로 월세를 내며 생활비를 충당했고 원래도 재능이 있던 동생은 알바를 해 제 용돈벌이를 하면서도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게 막 1년이 지났을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나는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 눈물을 흘렸고 동생은 눈물도 거의 보이지 않은 채 또 작은아빠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뤘다. 아빠가 밉고, 불쌍하면서도 미안한 양가감정이 장례식 내내 나를 지배했다. 와중에 회사에서 보내준 상조용품들이 내심 든든하게 여겨졌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없이 자란 내가 아빠가 돌아가신 와중에 아무것도 안 되어 있지는 않아서, 그래도 남들이 이름보면 아는 회사에 다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실 즈음부터 잊고 지내던 친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부산에서 재혼을 해서 살고있었고,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우리를 부담스러워했고 그러면서도 성급하게 본인과 살고 있는 아저씨를 아빠라 불러주길 원했다. 나와 동생은 자리 잡기에 급급했고, 항상 돈이 없었고, 엄마가 어느정도는 도와주기를 원했지만 엄마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아저씨에 의지해 살아가는 처지였고 우리를 부담스러워해 결국 돈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생겼다. 몇십도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엄마는 늦게 대학을 간 동생이 욕심이 많다며 비난했다. 그 일을 계기로 엄마는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그때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아, 우리에게 이제는 정말로 부모는 없다고.
나는 몸값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대기업으로, 중견기업으로, 다시 또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동생은 대학을 마쳤고 원하던 진로에서 자리를 잡았다. 다니는 회사는 번듯해져갔지만 삶은 여전히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조금씩 나아지나 싶으면 아빠가 내지않고 체납한 수년치의 건보료가 폭탄이 되어 날아오거나 숨겨놓은 빚이 발목을 잡았지만, 그래도 내가 벌어 동생과 나 자신을 케어하며 살아갈 수는 있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과 회사동료, 동기들이 하나씩 둘씩 결혼을 했지만 나는 결혼 생각을 애시당초에 접었다. 돈을 모으기에는 삶이 너무 빡빡했고 부모도 없는 내가 현실적으로 그린 미래는, 그래도 좋은 남자를 만나 오랜기간 연애를 이어오던 동생이 결혼해 애기를 낳으면 그걸 도와주는 이모로서의 삶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직한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나의 사정을 알고도 나와 결혼을 원했고 어려울거라고 생각한 결혼과정의 모든 고비들을 넘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작은아빠와 작은엄마는 혼주석에 앉아주셨고 기꺼이 남편의 장인장모가, 시댁의 사돈댁이 되어주셨다. 내동생은 내 결혼식에 축가를 불렀다. 나와 동생은 축가동안 내내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 우리의 사정을 아는 내 친구들과 친척들이 축가 내내 눈물을 흘려서 내 하객석쪽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의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동생도 곧이어 결혼을 했다. 우리 자매는 운좋게도 가까운 동네에 살게 되었고 살아온 중에 가장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아이를 원했고 부부사이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갖는게 겁이 났다.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30대를 훌쩍 넘긴 늦은 나이에 감당 못할 아이를 낳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 결혼 2년이 지나서 아이를 가질 결심을 하게 되었고 지금 내 눈앞에, 이제 막 돌이 된 내 아기가 있다.
나는 받고 자란 사랑이 부족했는데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은적이 없는 주제에 누군가를 자꾸 챙겨주고 보살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를 낳으면 어느정도 잘 보살필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가진 사랑을 아낌없이 주어야지,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막상 낳고 나니 그건 내 착각이었고 좁은 생각이었다. 나는 매일 아이를 통해 날마다 커지는 새로운 사랑을 배운다. 아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정말로, 태어나준것만으로 충분한 존재가 있다. 아기를 낳고 몇개월이 지났을때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얘를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게 아닐까 하고. 내 부모는 어떻게 아이를 그렇게 쉽게 버렸을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아마 내가 받았던 상처와 그로 인해 생긴 구멍은, 내 생을 관통하는 결핍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낀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안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주는 사랑이 더 크다. 온종일 함께 있어도 엄마아빠를 보며 좋아하고 웃어주는 모습에서, 매일 나는 여태 받아보지 못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인생의 긴 스토리를 한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 조각조각은 알고 있는 친구들이 있지만, 한번쯤 이렇게 쭉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 이 긴 이야기를 빠짐없이 읽어줬다면,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길고 지리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며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뭘까 생각을 해봤다. 크게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고 대단한 교훈을 줄 만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것만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생에 이미 닥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거기에 매몰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상처는 받을 수 있고 완벽히 치유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다보면,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기대한 적 없던 무언가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지금의 내 삶을 한번도 예상한 적이 없다. 나는 애초에 가족이라는 개념, 가족이 주는 사랑이나 안정감 따위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가족은 항상 불안함이나 불완전한 상태, 부러움을 뜻했고, 나는 그 결핍을 친구나 사회활동을 통해 채우려 애썼다. 그랬던 나는, 지금 행복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장 큰 행복은 가족이고 내 아기이다. 나는 이런 내 자신이 문득 신기하고 놀라울 때가 많지만, 그저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또 내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소소한 행복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