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상담이 끝난지는 아주 꽤 됐는데
새벽에 새삼 상담쌤한테 감사해서 후기방에 글로 남겨놓으려 해
난 걍 지방 사는 흔한 여고의 문제아였음.. 양아치는 아니고 문제아.
학교가 싫고 선생님이 싫고 나 자신도 싫었고 그냥 내가 너무 힘드니까 남들의 시선 이런건 보이지도 않음
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렇게 돼버린건데, 아무도 날 이해해주진 않고, 나한테 안 맞는 규범에 자꾸 날 끼워넣고
그냥 세상 모든게 다 싫었어 왜 싫은지 이유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음 온 사방간데 날 세우고 사느라 생각할 틈도 없었고..
결국 학교에서 대형 사고를 쳤고 당장 지역 청소년 상담센터로 끌려감 ㅎㅎ..
그 뒤의 이야기를 딱 1에서 7까지로 나눠봤어
혹시 지금 상담을 받아볼까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이거나, 주변에 힘들어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
1
첫날은 엄빠한테 끌려가서 성격검사 학습유형검사 두 개를 하고 또 상담센터 자체에서 만든 걸로 보이는 설문지도 객관식 주관식 두 장이나 했어
신기하게 그 검사지를 받으니까 진짜 사람이 서러워서 존나 솔직하게 적게 되더라. 검사도 설문도 모두 엄청 집중해서 함.
근데 그 뒤로 상담센터 가기가 진짜 너무 너무너무 죽기보다 싫었음 일주일에 하루 두세시간 대화 나누는거야 라고 하셨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금요일 오후마다 상담가라고 학교에서 2시 반이면 내보내줬는데 그대로 도망쳤었음
왜냐면 일단 그 상담에 대한 거부감도 거부감인데 상담쌤이 남자쌤이셨거든..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이는 40대 초반이셨음
친절한 여자 상담쌤이 와도 내 속마음을 열까말깐데 남자쌤이라니 진짜 존나 짜증이 났어
난 아빠도 싫고 학교의 남자쌤들한테 너무 많이 지쳐있어서 그 나이대의 남자라면 그냥 지긋지긋했거든
그래서 상담쌤이 본인 차를 끌고 나를 잡으러 다니셨어
학교에서 상담센터까지 걸어서 가면 30분정도 걸리는데 그냥 길거리에서 멍때리다 걸려서 쌤이 나 줍줍해가시고 그랬어
나중에 물어본거지만ㅋㅋㅋ 상당히 힘드셨대.. 집으로도 찾아가보고 학교도 들어가보고 나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날 발견하신거ㅋㅋ..
이런 나새끼한테 쌤은 한번도 무표정을 지은 적이 없으셔 맨날 환하게 웃으셨어
나를 본인 차에 태우시고 나서 왜 밖에서 그러구 있냐고 막 웃으시는데 걍 가기 싫어서 그랬다고 했어
그래서 그 3주동안은 맥도날드 드라이브쓰루에서 맛난거 사다가 그냥 차 안에서 상담하기도 하고
동네에 있는 벤치에서 두세시간 앉아서 얘기하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야 내 발로 상담센터를 들어갔음
2
나는 절대 솔직하기가 싫었어 딱히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음
쌤이 참 다양한 질문을 하셨거든
내가 첫날 풀었던 검사의 결과지를 받고, 내 성격은 이렇고, 내 장단점은 이렇다고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든지
이 설문지에 이런 답을 골랐는데 왜 이걸 골랐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자든지..
솔까 내가 그걸 너무 솔직하게 써놔서 쌤은 그것만 읽어도 나의 겉모습과, 내면도 어느정도는 다 꿰뚫어 보셨을 거임
그래서 그냥 이러이러했던걸까? 하시면 차마 거짓말은 또 못 하고 네 아뇨 이런식으로만 대답했어
이 시기엔 쌤이 80 말하면 내가 20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점점 쌤이 편해지긴 해서 가끔 오늘 느꼈던 일을 말하는 시간에 학교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음
사실 이 때 쌤에 대한 맘이 많이 열렸던게 나한테 굳이 애써가면서 무슨 피드백을 딱히 주시지 않으셨어
그냥 내가 와르르 쏟아내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빡쳤다 그러면 그래서 화가 났구나. 하면서 그래서 그 다음에 어땠는지를 계속 말하게 해주셨달까
굳이 해결책을 찾겠다고 이렇게해보자 저렇게해보자 하지 않으셨어 그게 너무 감사하다 진짜...
내가 고집이 센 아이라는걸 아셔서 그러신건지 아님 그저 들어주는게 먼저라고 생각하신건지 둘다인지는 모르겠지만..?
3
점점 내가 하는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어
원래는 그 첫날 작성한 설문지의 내용에 기반해서 나에 대해 쌤이 하는 질문 몇 개, 그리고 오늘이나 며칠 사이 나에게 있었던 일
이런 것만 말하곤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더디게 더디게 내가 하는 말의 바운더리가 넓어졌어
오늘 얘기에서 지난 주 얘기를 꺼내고 그러다 지난 달 지난 해 더 어릴 때 이야기까지 아아주 조금씩 얘기해나갔어
솔직히 만으로 16 17년 남짓 산 게 뭐 얼마나 큰 이야깃거리가 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난 할 얘기가 많았어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많이 한 케이스라서. 그 중에 극히 일부만 열었는데도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어
이때부턴 썜이 본격적으로 내 얘기를 노트에 필기하면서 듣기 시작하셨어
그게 신기했고 내가 진짜 답없이 솔직하게 말도 안 되는 너무 과하게 솔직한 소리도 진짜 많이 했거든ㅋㅋㅋㅋㅋㅋ
난 그런 내 모습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에 대해 고민해주는 사람이 생긴걸 느꼈어
이 때 쯤에 친구들한테 한창 그런 말을 하고 다녔던 것 같아 살면서 처음으로 나랑 진지하게 동등한 대화를 나누는 어른을 만났다고
4
그 뒤로는 상담센터 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것 같아. 시간이 처음으로 모자라 본 것도 이 쯤이었음
진짜 내가 살아오면서 나라는 사람을 형성한 1000가지의 요소들이 있었다면 한 500개까지를 와르르르 풀어놓은 시기였어
나는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이라 화나도 억울해도 울지 않았는데 상담쌤은 내 앞에서 코까지 풀어가면서 우시더라
1개를 얘기하든 500개를 얘기하든 최대한 솔직하게 하려고 했어 왜냐면 날 이해해주는 단 하나뿐인 어른인데 여기서까지 거짓말을 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난 내가 습관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걸 알게 해주셨어 감사했어
점점 더 어릴떄의 이야기들, 사소하고 나만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들로 접어들었고 쌤은 여전히 딱히 이렇다할 피드백을 주시진 않았어
난 여전히 학교에 있기가 너무 힘들었고 쌤들이랑 부모님은 상담 그거 효과가 있긴 있는거냐며 날 쪼아댔고
지역 청소년 상담기관이 아닌 (여긴 무료였어) 사설 기관이었다면 돈 아까우니 당장 그만 가라고 할 기세였지
그랬는데도 썜은 그냥 잘 버티고 오라는 말만 하셨던 것 같아 근데 그게 진짜 힘이 되더라
일주일에 한 번 딱 두세시간이라도 온 세상에 곤두세웠던 날을 내려놓고 엄청 솔직하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대화한거지
그건 진짜 소중한 시간이었던거임 물론 그 때는 몰랐고ㅋㅋㅋ
상담 이거 이래서 효과가 있긴 한건가 싶으면서도 걍 상담쌤이 좋은 사람 같아서 꾸준히 가긴 갔던 기간이야
5
나를 형성한 1000가지의 요소들 중 500정도를 털어놓으니까 마음이 한결 가볍더라
근데 그 반대로 나머지 500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대한 그 압박감도 생겼던 것 같아
이걸 쌤도 느끼신건지 뭔지 몰라도 이 때 다시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음.. 모든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하고.
이번에 쌤은 별다른 말 없이 본인 이야기를 해주셨어
가족관계는 어떠신지, 어린시절 학창시절은 어떠셨는지, 어떤 청년기를 보내고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그래서 또 상담쌤이랑 되게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졌어. 그러면서 나도 한마디씩 거들고..
아 맞다 이 시기에 쌤이 울 부모님한테 다시 연락을 드렸었어 (이전까지는 내가 싫다고 해서 상담쌤과 부모님의 소통은 없었던 상태야)
나한테 몇번이고 물어보셨어 내가 썜한테 말한 수많은 얘기들 중에 이런이런 얘기들을 부모님께 드려도 되겠냐구
그래서 나도 깐깐하게 이거이거는 되는데 저거저거는 안돼요. 하면서 선을 그었던 것 같아
하지만ㅋㅋㅋ 울 부모님은 상담쌤의 연락을 탐탁치않게 여기셨음
내가 몇 달을 다니는데도 학교에서 집에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러셨음 (엄빠 피셜임ㅇㅇ)
글서 쌤은 울 엄빠를 상담센터에 모시는걸 실패했고, 전화로만 간단한 상담을 하셨다고 들었어.
울 엄빠는 두 분 다 상당한 원칙주의자시거든.. 쌤도 이 뒤로 다시 울 부모님께 연락을 하는 일은 없으셨어
진짜 신기하더라. 내가 원치 않으면 내 부모가 내 상담에 개입할 수 없는거지 이게 너무 좋았어
6
적의 적은 나의 확실한 아군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어서 이 뒤로 쌤한테 선전포고를 했어
제가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큰 부분들이 있는데 이걸 말할지 말지 엄청 고민했다고
저의 기준에서는 이게 저에게 있어서 엄청 큰 부분들인데 쌤한테는 그렇게 안 들릴 수 있다고 그래도 진짜 큰 부분들이니 들어주시라고 했음
쌤은 뭐 그럴 줄 알았다 이런 반응을 보이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진짜 고맙다면서 그 날 밤에 장문의 문자도 보내셨음
사실 그 큰 부분들 중 하나가 덬질에 관한 내용이었어
난 짜증나는 현실을 좆까고 난 뒤의 도피처가 케이돌이었거든
중딩때부터 학교 째고 나이 속여서 알바하고 그 돈으로 콘서트니 팬싸니 뭐니 다 다녔고
이어폰을 너무 오래 끼고 있어서 고1땐 오른쪽 귀에 병이 나고 고2땐 양쪽 귀에 병이 나고..
누가 들어도 야 이 한심한 새끼야 니가 그러고도 학생이고 인간이냐 할 그런 이야기들이지
근데도 쌤은 역시 00이가 잘 버티는데는 이런 엄청난 이유가 있었던거라며 이 이야기를 들은걸 엄청 행복해하심
원래 상담중에 폰 꺼두시는데 바로 폰 꺼내서 내돌 이름 검색해보고 이 친구들한테 고맙다고 편지라도 써야겠다고 또 껄껄 웃으심
7
그렇게 1000개중에 999정도를 다 털어놓고 나니까 세상 와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더라
학교든 집이든 어디서든 씨발 나는 존나게 혼자고 남들은 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았는데
내 편이 생기고 내 말을 듣고 내 맘을 이해하고 내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딱 하나 생기니까
어쩌면 저런 어른이 더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까지도 드는 거야
그래서 그 뒤로 점점 뭐랄까... 날을 조금씩 내렸던 것 같아
세상은 날 이해하지 못해!!! 에서 저 사람은 날 이해 못 하나보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
그러면서 차차 상담을 마무리했지 일단 내가 겪었던 신체화 현상들이 거의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거든
그리고 세상을 용서하기 시작하면서(ㅋㅋ) 내가 일으키는 문제의 빈도도 확 줄어들었고
항상 난 부모가, 선생이 먼저 변해야 내가 안 이러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먼저 바뀌어서 그들을 친히 이해해준다는 느낌으로 살았어ㅋㅋㅋ
그래서 난 쌤한테 항상 감사해 진짜 감사하고 평생 감사할 예정이야
쌤한테 말씀드리지 못했던 단 하나가 내 외모 콤플렉스였는데
이건 말씀드리진 못했지만 스스로 마음이 치유되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중인 것 같아!
음... 이걸 어떻게 마무리짓지 음 음 음
학생덬들에게 : 지역 상담센터에는 생각보다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 비밀 보장은 진짜진짜 최고인데다 무료니까 힘들때 직접 찾아가긴 좀 그렇더라도 전화상담이라도 한 번 해보는걸 추천해 ㅎㅎ
상담덬들에게 : 해결책을 굳이 제시해주지 않아도 나를 열렬히 지지해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치료약인 것 같아.. 내가 계속 쌤이 별다른 피드백은 안 주셨다 했지만 이게 아마 최고의 피드백이었나봐..ㅠㅅㅜ
덕분에 지금 대학생이 된 나는 전혀 다른 전공에 있으면서 심리학을 기웃거리는 녀석이 됐어ㅋㅋㅋㅋ
쌤을 못 만났으면 아마 난 대학도 못 왔을거야 히히
벌써 새벽 네 시가 넘었네 글 끝까지 읽어준 덬들 있다면 너무 고맙고 좋은 하루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