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밝히며 시장에 켜져 있던 백열등들도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빨간 체육복 차림으로 가게를 정리하러 나온 관식은, 좌판 밑에 몰래 숨겨준 점복을 살짝 망으로 옮겨담았다. 어째 오늘은 영 크기가 작아보이는게 마땅치 않아 보여서 두 개를 챙겨두었다. 그러는데 가게 쪽으로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관식이 귀에 익은 발소리였다. 오애순. 근데 얘가 왜 이 시간에 여기를?
“늬 집 방 몇 갠데?”
생각지도 못한 애순의 질문에 잠시 관식의 몸과 마음이 버벅댔다. 하지만 말보다 관식을 놀라게 한 건, 애순이의 말에 흠뻑 배여 있는 짠내였다. 관식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애순의 말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오빠, 너 니네 할머니 이겨?”
뭘 물어보고 있냐. 오애순. 양씨 집안 박막천이를 동네에서 이기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도, 애순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지도 못하고는, 애순은 스스로 답을 내려버렸다. 이길 리가 없어. 저 소 죽은 귀신 붙은 거 같은 게. 어떻게 이겨.
“지지? 지지?”
그렇게 애순의 얼굴이 구겨지며 어린 아이같은 울음이 와앙 터졌다. 그런 애순을 보는 관식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왜왜. 뭐, 왜, 누가 또!”
“아, 나 부산 가래!”
부산? 부산? 관식이는 순간 멍해졌다. 오애순이 제주를 떠난다. 호주머니 안에 쏙 들어오던 저 따뜻한 작은 손을 가진 애가, 아침이 들면 나는 해처럼 양관식의 인생에서 지는 법이 없던 저 계집애가 부산을 가?
“나 공순이 하래! 나 이제 집도 없어.
순남이 순봉이 새끼는 께끼에 넘어 갔고 할머니네는 쫄딱 망했고
나는 무슨 아랫목도 없고
천지에 오애순이 반긴다는 곳 양관식이밖에 없으니까.
그니까. 아이씨...”
께끼는 뭔 소리고 아랫목은 뭔 소린지. 관식이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관식이가 아는 것은 지금 애순이가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내가 섬놈한테 왜!”
애순이는 바둥거리다가 결국은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 참 못났다. 스스로가 너무 못났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 온전한 슬픔을 털어낼 곳이, 관식이밖에 없었다. 애순이한테. 관식이는 그런 애순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제 키만 하던 애순이보다 관식은 이제 머리 하나는 넉넉히 더 컸다. 더 이상 10살이 아니다. 그러니까. 관식이는 입을 열었다. 애순이의 울음을 지울 만큼 큰 소리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마치 웅변을 하듯이 터져나온 관식의 떨리는 외침에, 애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갑자기 뭔 노스탤지...애순의 머릿속에 순간 자신이 관식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무조건 서울놈한테 시집갈거야. 급기야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놈은 절대, 네버!!”
양관식에서 오애순의 말은 성경같은 것이었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때로는 마음에 멍이 들게 막 때릴 때도 있지만, 반드시 외워야 하는 그런 것. 노오란 유채꽃밭에서 알싸하게 뽀뽀를 해놓고서는 죽어도 저한테는 시집을 오지 않는다는, 저 조그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계집애의 말을 관식이는 어릴 적부터 단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노스탤지어를 알면, 시집을 올 수 있다는 건가. 관식이는 평생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할 정도로, 그 놈의 시라는 것을 달달달 외웠다. 하지만 이 시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관식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애순이가 좋아하는 시니까. 애순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관식이는 알고 싶었다. 조구가 더 좋은지, 점복이 더 좋은지. 그 놈의 노스탤지어라는 희한한 단어에 뭐가 들어있길래 저렇게 애순이년은 노스탤지어가 중하다고 하는지. 그래서 양관식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나 뿐이었다. 달달 외우는 것.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
안다. 이런 노력을 해도 결코 그는 애순이 꿈에서도 바라는 서울놈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제주 섬놈인걸 어쩌겠는가. 눈에 든 순간부터 애순이만 바라보게 된 걸 어쩌겠는가. 그러니까, 이 무쇠같은 놈은 쇠처럼 닳지 않는 마음으로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처럼 나부끼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아, 누구인가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매달 줄 안 그는!”
애순은 토끼눈을 해서 관식을 올려다보았다. 이 놈 미친 놈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인생에서 누가, 애순을 위해서. 그녀가 사랑하는 시를 이렇게 외워줄까. 마음 속을 어지럽히던 슬픔의 바다 밑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미칠 듯이 간질거리고, 탈 듯이 뜨겁고, 벼락처럼 요란한 무언가가.
“아, 노스탤지어만 알면 뭐해! 나 대학은? 시인은? 나 육지는?”
하지만 맘과는 달리, 입에서는 또 모진 말만 나왔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건지, 애순은 자신의 입을 때려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말들을 관식의 마음을 하나하나 때린 뒤였다. 하지만 애순은 떼를 쓰고 싶었다. 어린 아이처럼. 제 답답한 마음을, 제 힘듦을, 마구 마구 토해내고 싶었다.
“다는 못해줘.”
으허허엉. 애순의 울음이 격해졌다. 관식이도 미칠 지경이었다. 그깟 거짓부렁이 뭐라고. 조구도 점복도 그렇게 잘 쌔벼갖다줘놓구선. 왜 애순이 앞에서는 거짓말 하나가, 나쁘지도 않은 거짓말 하나가 이렇게 힘든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도 꼭 하나. 하나는 죽어도 해줄 거야.”
“아 그냥 말이라도 쫌! 그냥 다 해준다고 해.”
애순은 관식의 가슴을 퍽퍽 쳤다. 이 놈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왜 남들같이 않은 걸까.
“그냥 별도 달도 다 따준다고 하라고. 나 이런 거랑 어떻게 살아.”
애순이가 꿈꾸는 서울 놈은 양관식과는 너무 달랐다. 시를 알고, 문학을 알고, 사투리도 없고, 나긋한 말투에 피부도 하얀. 모든 것이 양관식이와는 반대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오애순을 향해 관식이만큼의 불타는 마음을 가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애순은 알았다. 그런 애순을, 관식이 덥썩 안았다. 작은 애순의 몸이 관식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밤의 한기 속에서도, 관식의 품은 따뜻했다. 밤하늘 아래 빛나는 저 백열등처럼.
“몰라. 구라는 못 쳐.”
관식이의 말 끝에도 울음이 뭍어났다.
“너 사실 니네 할머니한테도 지지? 지지?”
관식이의 손이 애순이를 토닥였고, 애순이의 두 팔이 관식이를 힘껏 껴안았다. 이것은 세상 멋이 없는 로맨스였다. 애순의 밭에 나는 양배추처럼 흙내가 났고, 관식이가 빼돌린 점복처럼 초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애순은 알았다. 내 인생에서, 나는 이것이 꼭 가지고 싶었다는 것을.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시끄러워.”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고만해!”
그날따라 까만 제주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순의 마음에는 별이 한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