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난한 표정으로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듯한 여경
송주 "어머.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었나봐요?"
여경 "아.. 아니에요."

송주 "무지 실망하는 표정인데요?"

여경 "그.. 근데 영랑씨 수업은 다음 주부터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송주 "아, 오늘은 나 혼자 왔어요. 심심해서 책이나 두어권 살까 해서요."

여경 "네. 그럼 천천히 둘러보세요."
송주 "그럴까요 그럼?"
책을 둘러본다던 송주는 밀서가 들어있던 책을 골라 집어드는데
송주 "해당화 핀 언덕에 잠든 흰 고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
여경 "흰 고래는 잠에서 깨어나 바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송주 "그것 참 다행이군요."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동지로써의 눈빛을 나누는 여경과 송주
.
.
.
수현 "조국해방 투쟁에 청춘을 바쳤지만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형에게도 여러 번 이야기 했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
강자가 약자를 이끌어 주는 것이 사회진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과 함께 해야 한다,
내선일체만이 조선의 민중들이 살아갈 길이다..
콧방귀도 안 뀌더군."

수현 "하지만 한 번 둘러봐.
수많은 청춘들이 뜨거운 피를 바쳤지만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했나?
민중들은 여전히 무식하고 미개하고 무능해.
지식인들은 여전히 피해의식과 열패감에 빠져있지.
무지한 그들과 뭘 할 수 있겠나."
수현 "열등감에 빠져있는 그들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지?
일본을 인정하고 그들의 적자가 되는 길만이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완 "그래서 형을 팔았냐?"

완 "대답해! 그래서 형을 밀고했냐고 묻잖아!"

수현 "가망 없는 조선에 아까운 청춘을 바치는 노릇,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형에 대한 애정이었다.
결과가 비극적이어서 유감이었지만.."

수현의 위악을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완


완 "그래도 나는 가끔은 니가 그리웠다 이 개자식아."
완 "뭔가 폼나는 사연이 있었겠지,
들을 준비가 되면 들어줘야지,
들어주고나서 위로해줘야지,
그런 다음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해야지.."

완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이 개자식아!"
완 "사는 동안 다시는 만나지 말자. 오늘 너는 내 안에서 죽었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순수했던 시절 행복했던 그들의 기억
이제는 아픔이 되어버린 추억에 붉어지는 수현의 눈가
무거운 표정으로 그저 걷기만 하다 문득 보니 해화당 앞이고
저도 모르게 향했던 발걸음을 애써 돌리려는데
그 때 서점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필성

필성 "아저씨!"

필성 "안 그래도 선생님한테
아저씨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왔는데!"

완 "나를? 왜?"

필성 "솥단지 팔아서 샀어요. 그 날은 너무 고마웠습니다."
'민중들은 여전히 무식하고 미개하고 무능해.
무지한 그들과 뭘 할 수 있겠나.'
'정말 고마워요. 오늘 당신은
그 아이한테 세상 전부를 갖게 해주셨어요.'
환하게 웃는 필성을 보며 상충하는 수현과 여경의 말을 차례로 떠올리는 완
.
.
.
근덕 "애물단의 조직원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나선생님."
여경 "애물단.. 어떤 뜻의 약자인가요?"
송주 "말씀드려."

근덕 "조선의 혼을 고취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촉구하며,
식민 지배를 타파하고, 자주독립을 실현하며,
충의와 희생정신으로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자유평등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며,"

송주 "덧붙여,"

근덕 "애국은 물론 해야 하며, 단 열심히 해야 한다."

송주 "줄여서, 애.물.단. 이랍니다."

여경 "아니 앞 문장에 좋은 말이 더 많은데 왜 하필 뒷 문장에서.."

송주 "앞 문장에서 이것저것 조합해봤는데
이미 다른 조직에서 다 갖다 썼더군요.
뜻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수장님의 지시가 있어서
제가 카리스마 좀 발휘했어요."

근덕 "그러게 내가 구구단으로 하자고 그랬잖아.
'구하고 구하면 구하리라,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좋아? 간결하고."

송주 "이미 끝난 얘기잖아. 자꾸 집착할거야?"

송주 "어머. 설마 정말로 믿는 건 아니겠죠?"

여경 "아니.. 그럼.. 농담..?"
송주 "빙고! 애국, 애족, 애민을 넘어 만물을 사랑하는 단체.
그게 바로 애물단의 정체성이에요.
여경씨가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서 농담 좀 해봤어요."
그제서야 굳었던 표정이 풀리는 여경
강구 "나여경 이 여우같은 년. 두 남자를 후려서 미꾸라지같이 빠져나가?"
'남자아이었어요. 틀림없이 그 녀석이었어요.'
자신의 육감은 분명 강인호가 범인이라고 말하는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않자 짜증이 솟구치는 이강구

그 때 이강구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뒷걸음질치는 쌀집 주인

강구 "왜 피해?"
"피한게 아니라.."

강구 "강인호한테 연락 왔지."
"아닙니다요..!"
강구 "강인호 그 자식 지금 어디있어."
"저.. 정말.. 모.. 모릅.."

강구 "연락왔잖아, 말해! 강인호 그 자식 어디있어!?"
강인호 그 자식 지금 총 조립 연습중

여경 "인호야!"
인호 "선생님!"

여경 "무사했구나.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몸은 건강한거야?"
인호 "전 괜찮아요."

여경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왠지 흐뭇
송주 "민환식은 일제의 밀정이었어요.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밀고해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죠."

여경 "애물단은 그러니까, 이를테면 암살집단인가요?"

송주 "으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음, 뭐랄까. 뭐 차차 말씀 드리겠지만 일단은 비밀결사대 쯤으로 해두죠."

송주 "물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일곱 종류로 분류해서 분리수거합니다.
이른바 칠.필.살."

송주 "어머, 겁먹지 말아요.
여경씨한테 암살 명령이 내려오진 않을테니까.
암살자는 나 하나로 충분하거든요."
송주 "친일 세력 한 두 명을 처리한다고 조국이 해방되나?
그런 생각했죠 방금?"

여경 "독심술도 하세요?"

송주 "독심술은 연마 중이고, 독순술은 수준급이죠."
여경 "재주가 참 다양하시네요."

송주 "물론 암살 대상 몇 명을 죽인다고 갑자기 조국해방이 되진 않겠죠."

송주 "하지만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징적인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여경 "상징적인 가치.."

송주 "자신의 이름이 살생부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벌벌 떨고 있을 그들을 생각해봐요.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요?"
강구 "어때? 이제 정신이 확 들지?
생각나는거 있으면 다 꺼내놔."
"왜.. 왜 이러세요 나으리.."

강구 "강인호 그 자식 수상한 놈들이랑 내통하고 있었지?"
"저는 정말 아무것도.."

강구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수상한 낌새 같은거 안풍겼나?
하나라도 숨기는게 있으면 너도 죽어."
"나.. 나으리...!"

강구 "말 안 해 새끼야?"
"그.. 그 놈 때문에 작은 소동이 있긴 했습니다."

강구 "소동? 무슨 소동."

"별 건 아니구요..
인호 그 놈이 순사부장님한테 피떡이 되게 맞고는
다음날 바로 가게를 관뒀는데 그 다음 날인가?
명빈관에서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인호를 찾드라구요."

강구 "명빈관? 명빈관에서 강인호를 왜 찾아?"

"싸.. 쌀이 잘못 배달됐다고, 고관대작들 상에만 올리는 거라고
최상품으로다가 이천에서 별도로 실어왔는데
그 쌀이 아니라고 인호를 좀 만나겠다고..
제 생각에는 인호 그 놈이
민환식이네 집으로 갈 쌀을 명빈관으로 보내고,
오히려 명빈관 쌀을 빼돌린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강구 "강인호.. 죽은 민환식에게 원한이 있었고
민환식에게 갈 쌀을 명빈관으로 잘못 배달했다,
사건 당일 얼굴 없는 용의자는 명빈관으로 도주를 했다,
그 시각 명빈관 기생 차송주는 자리를 비웠고
나여경은 명빈관에서 선우완과 함께 밤을 보냈다,
나여경은 강인호의 야학 선생이다.."

강구 "강인호, 명빈관, 차송주, 나여경, 선우완.. 명빈관.."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눈빛을 번뜩이는 추리왕구난..
여경 "근데 왜 조직의 존재를 숨기고 활동하죠?"

송주 "이유는 간단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한테 당해야 공포감이 더 하니까.
따라서 우리 조직의 최대 전술은 비밀과 위장이에요.
조만간 두 번째 암살지령이 내려올 거에요.
여경씨한테도 뭔가 지령이 전달될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학희 "여경아!"

여경 "어머니! 이게 뭐에요?"
학희 "애들 간식 좀 하라고 미숫가루랑 감자 좀 쪘어."

여경 "애들이 벌써 왔어요?"

학희 "그게 아니구 어젯밤에 그 청년 말이다,
필성이랑 뭐가 통했는지 둘이 신나게 의기투합이 되가지고는
야학 애들 죄 불러 모아서 운동장으로 데려갔잖니."

여경 "그 사람이 우리 애들을 왜요?"

학희 "낸들 아니? 암튼 재밌는 청년이야."

학희 "근데 어디 갔다 오는 길이니?"

'우리 조직의 최대 전술은 비밀과 위장이에요.'

학희 "왜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여경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학희 "아이구 내 정신 좀 봐라. 참 니가 이거 들고 가야겠다.
대화정 사모님이 옷에 문제가 생겼다고 온대잖니. 얼른 들구 가, 응?"
운동장으로 가보니 아이들과 한데 모여 신나게 공을 차고 있는 완이 보이고
밝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는 여경
완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본 여경은
어젯밤 울먹이며 형을 찾던 완의 중얼거림을 떠올리고
걱정스럽고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퍽 소리와 함께 여경의 머리를 정확히 맞추고 떨어지는 공


완 "아이고 미안! 우와 공이 왜 절로 가냐?
나는 분명히 골로 찼는데! 니네 봤지? 나 절로 찬거!"
여경이 다가오자 아이들을 방패로 뒤에 숨는 완
여경 "다분히 고의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완 "니네들 니네 선생님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르지?
꺼떡하면 주먹질에 발길질에 박치기에.."
여경 "어! 얘들아! 이번 판만 끝내고 간식 먹고 놀아? 힘드니까!"

째릿

완 "같이 한 판 뛰자!"

여경 "싫습니다!"
완 "그러지 말고 같이 뛰자, 마자야"
여경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요!"
하지만 곧 완과 아이들 틈에 섞여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 여경

송주 "우리 나선생,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인데?"

근덕 "절대 불가능한 조합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잘 어울리는 커플이군."


송주 "조국은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을 해도
청춘은 언제나 봄인가? 왠지 서글프네."
완 "?뭘 봐?"

여경 "형님 되시는 분은 잘 보내주고 왔어요?"


여경 "어제 잠꼬대 하는거 들었어요.
그 옷 상복 맞죠?"

완 "잠꼬대까지 했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여경 "안 가르쳐 주겠습니다."

완 "내 잠꼬대를 내가 좀 알겠다는데 니가 무슨 권리로!"
여경 "뒷 끝이 찜찜해야 인사불성 될 때까지 마셔대는
술버릇을 고칠 거 아니에요."

완 "관둬."

관두라고 한지 1초만에 태세전환

완 "아 무슨 말 했는데 내가!"
여경 "안 가르쳐 줍니다!"
완 "하. 별 생색을 다 내네 진짜."
여경 "억울하면 이제부터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그러다 몸 망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술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도 몰라요?"
여경 "밤새 끙끙 앓아대기나 하고,
중얼중얼 헛소리나 해대고, 사람 걱정시키고..
이기지도 못하는 술 기어이 먹어서 무슨 득을 봤어요?"
여경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술로 풀지 말고 문제와 정면 대결해서 푸세요.
힘들어도 그게 옳아요."
여경 "왜 웃어요? 남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완 "바가지 긁는 마누라 같아서."
여경 "마.. 마.. 마누라는 누가..!"

완 "어제 내 걱정 디게 많이 했구나?"
여경 "거.. 걱정은 무슨..!"

완 "에이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밤새 내 옆에서 간호해준거 다 아는구만."
여경 "됐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진지함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사람한테."

여경 "앞으로 다시는 술 먹고 찾아오지 마세요!"

완 "술 안 먹고 찾아오는 건 된다는 얘기네 그럼?"

여경 "먹거나 안 먹거나 오지 마세요!
먹거나 안 먹거나 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행동하잖아요!"


완 "에이, 내가 보이다 안 보이면 또 심난해 할거면서."
여경 "...무슨 잠꼬대를 했는지 절대로! 안 가르쳐 주겠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술로 풀지 말고 문제와 정면 대결해서 푸세요.
힘들어도 그게 옳아요.'
여경의 걱정이 담긴 위로를 곱씹어보는 완
.
.
.


관 "니가 여긴 웬일이냐. 돈 필요하냐?"
완 "그래보여요 제가?"

관 "돈 말고 니가 나 볼 일이 뭐 있어.
그거라도 줘야 얼굴 뵈어주지않니. 얼마나 필요한데?"

완 "저랑 술 한 잔 하시겠어요?"

관 "너 아버지 회사로 안 들어올래?
우리 회사에도 사보잡지가 있다.
거기 들어와서 일하면서 몸 좀 풀고
중장비쪽 일은 내가 사람 하나 붙여서.."

완 "수현이 만났어요."
완 "형한테 왔더라구요."
관 "물어봤냐..?"
완 "고문이 심했었나봐요.
견딜 수 없을만큼 끔찍하고 혹독한 고문이었대요."
완 "자기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죄책감 때문에 쭈욱 괴로웠대요.
위악이라도 떨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더래요."
완 "차라리 총독부 직원이 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래요."


관 "못난 놈.."
완 "앞으로 서로 남인 채 살아가자고, 그래야 지 맘이 편할거 같다고,
자기가 위악을 떨어도 너무 상처받지 마시라고 그렇게 전해달래요."

관 "내심 그럴 거라고 나도 생각은 했었다.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그런 고문을 견딜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오죽했으면.. 오죽했으면.. 불쌍한 놈.."

어쩌면 본인이 수현에게서 듣고싶었을 변명들,
아버지를 위해 그 거짓된 이유들을 전하며
관이 볼새라 몰래 눈물을 훔치는 완
.
.
.
코우지 "하루종일 어디 쳐박혀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건가?
보안과 직원은 24시간 비상근무라는거 모르나?
도대체가 연락이 되야 지시를 전달할거 아니야!"
수현 "사건입니까?"

코우지 "지금 당장 명빈관으로 가 봐."

수현 "명빈관이요?"

코우지 "근신 중인 이강구가 차송주를 만나겠다고 행패를 부리는 모양이야.
자네가 가서 수습해."

수현 "보안과에서 그런 일까지 맡아서 해야 됩니까?"

코우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결국 뒤탈이 생기는거 아니야!"

수현 "이강구의 근신 처분은 선배님도 바라셨던 일 아닙니까?"

코우지 "한 마디도 안 지는군, 한 마디도."

명빈관으로 갈 생각에 심난한 수현

난향 "언니! 왜 이제 와요! 큰일났단 말이에요."
송주 "큰일이라니?"

월선 "지금 손님 방에 이강구가 들어있는데요..!"
송주 "그런데?"
월선 "자꾸 언니를 찾길래 언니는 고관대작들을 모시느라 바쁘다,
모자라지만 즈이가 성심으로 모시겠다 그랬거든요?"

송주 "몸통만 얘기해 몸통만."

월선 "그랬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쨌는지
괜히 영랑이를 붙잡고 행패잖아요."

방에 들어가보려는 근덕을 제지하고

송주 "알았으니까 니들은 들어가서 일 봐."
분노가 치솟는 송주
강구 "다시 한 번 말해봐."
영랑 "죄.. 죄송합니다.."

강구 "그거 말고!"

영랑 "차.. 차송주는.. 경성 최고의 기생이라 만나시기 좀 어.. 어렵습니다.."

강구 "건방진 년. 기생년 주제에 감히 나를 졸로 봐? 이 천한 기생 년!"
분풀이하듯 발길질을 서슴지 않는 ㅈ구
송주 "그만하시죠 손님."

강구 "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경성 최고의 기생 차송주씨 아니십니까.
이렇게 알현을 하게 되니 영광입니다?"

송주 "술이 좀 과하셨군요 손님.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안 되시죠."
강구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송주씨 얼굴을 뵐 수가 있어야지요 어디."

송주 "저런. 이런걸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수치라고 해야 하나."

강구 "최근에 강인호 본 적 있지."

송주 "근신 처분 중에 공권력을 이용한 수사는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요?"

강구 "난 공권력 이용한 적 없어. 내 육감을 이용할 뿐이지."

송주 "영업 방해는 해당되는거죠 그럼?"

맞말에는 말문이 막히는 편


강구 "차송주!"

송주 "나가는 문은 저 쪽에 있네요."
강구 "고관대작들만 상대하더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송주 "튀어나올 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기생이라는게 원래 간 빼고 쓸개 빼야 손님 같은 분도 접대할 수 있거든요."

강구 "니가 나를 만만히 보는 모양인데.."

송주 "설마요. 열등감은 쓸데없는 자기비하라던데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면 즐거운가요?"

강구 "건방진 년. 몸 팔아 얻은 권력 등에 업고
눈깔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괜히 나 자극해서 명 재촉하지마."
강구 "돈만 주면 아무 남자 앞에서나 치맛자락 걷어 올리는
천한 기생 년 주제에 어디서 건방..!"

송주 "죽고싶어?"
강구 "뭐야?"
송주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없애줄까 내가?"
송주의 도발에 손을 치켜들던 강구에게 날라오는 분노의 수현펀치


수현 "자네에겐 도무지 경고라는게 먹혀들지 않는군.
상부에 보고를 올려봐야 조선인의 수치밖에 안 될 테니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해두지."
수현 "같은 조선인으로서 베푸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야.
조선 땅에서 순사노릇 계속 하고 싶거든 지금 당장 꺼져."

오늘의 부들부들 +1
수현 "괜찮으십니까?"
송주 "보다시피요."

수현 "부하직원을 대신해서 사과드리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럼."

송주 "감사의 표시로 제가 술 한 잔 사도 될까요?"

수현 "마신 걸로 해두죠."

송주 "받아만 놓으세요 그럼. 마시는 건 내가 할테니까.
제가 빚 지고는 못 사는 체질이라서요."
더이상 거절하지 못하는 수현
송주 "아까 눈빛 좋던데요? 주먹도 꽤 멋졌어요.
자존심이 심하게 다치는 중이었는데 제법 치료가 됐거든요 덕분에."
수현 "일본 경찰한테 너무 위험한 발언을 하시더군요."


송주 "위험한 발언? 아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앤다는 말이요?
진상 손님들을 제압할 때 늘상 쓰던 말이라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네요.
상대가 일본 순사라는 사실을 깜빡했군요. 앞으로 주의하죠."


수현 "주시하겠습니다."

송주 "총독부 관리가 예전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상부에 알려지면 꽤나 곤란하겠죠?"

수현 "협박하시는 겁니까 지금?'


송주 "뭐 서로 덮어주자는 거에요. 이를테면 비밀 거래 정도?"

송주 "아, 예전에 명빈관을 오가며 함께 활동했던
그 선배 분은 어떻게 됐나요?"
송주 "우리 동기들한테도 꽤 인기가 좋았었는데.
교복에 박혀있던 이름이 뭐였더라.. 아! 선우민, 맞죠?"

수현 "알고싶은 게 뭡니까 도대체."

송주 "선우완과 선우민, 두 사람은 형제인가요?"

송주 "맞나보군요. 대충 끼워 맞춰 본 건데.
하긴 그리 흔한 성이 아니니까."
송주 "미안해요. 저번에 완이랑 하는 얘기를 엿들었어요.
'민이 형이 지금 니가 사는 모습을 보면 꽤나 기뻐하겠군' 맞나요?"
송주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 재미있는 인연으로 얽혀있네요 우리."


지난밤 붉어진 눈가를 가리던 완의 모습을 떠올리는 여경


여경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거지?"
.
.
.
근덕 "왜.. 왜.. 왜 그러세요 도련님..?"
완 "니.. 니가.. 니가 왜 여기있어! 남의 방에서 뭐하는 거야 지금!?"

근덕 "그게 아니라 도련님 저는요,
도련님이 밤새 끙끙 앓으시길래 고뿔이라도 걸린게 아닌가 싶어서
열을 짚어본 건데 도련님이 갑자기 스윽 느끼한 미소를 지으셔가지고.."

잠이 확 깬 완은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세숫물 대령했습니다. 씻으시지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역시나 여경이 아니고

소홍 "왜 그렇게 놀라세요 오라버니?"
완 "아니 영랑이가 아니라 니가
세숫물을 들고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서.."

소홍 "영랑이 당분간 오라버니 세숫물 심부를 못해요.
해화당에 글공부 하러 다니느라 바쁘잖아요 요즘."

완 "해화당?"

영랑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여경 "세상에. 영랑씨는 얼굴만 고운게 아니라 글씨도 참 예쁘게 쓰네요."

영랑 "정말요?"
여경 "쉬운 글자는 조금 읽을 줄 아니까
열심히만 하면 금방 한글을 뗄 수 있을 거에요."

영랑 "저 그럼 연애소설도 읽을 수 있어요?"

여경 "그럼요. 연애편지도 쓸 수 있을걸요?
영랑씨가 읽을 만한 쉬운 책이 하나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요."
영랑 "어? 총독부 나으리가 여긴 어쩐 일로.."
총독부라는 말에 돌아보는 여경
모던뽀이 미소 장착하고 당당하게 차에서 내리던 완은
불현듯 나는누구여긴어디 상태가 되어 차로 다시 호다닥 들어가고
완 "아니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온거지?"
완 "아, 내기! 그래, 내기! 내기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함이지.
맞아, 이유가 있었지!"
애써 합리화하고 다시 한껏 미소 지으며 내리려다가 또 한 번 멈칫하는
완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 그랬는데.. 찾아오면 싫어할라나?"
완 "아니 뭐가 문제야? 나는 영랑이를 데리러 온거잖아?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얼마나 힘들겠어?"
완 "그럼! 오라버니가 돼서 만학의 꿈을 펼치는 여동생을 도와줘야지.
암 도와야지! 여동생이 공부를 하는데."
흡족한 표정으로 호기롭게 여경에게로 향하던 완은
수현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어버리는데
여경 "이강구 순사부장님을 왜 여기서 찾으시죠?
부하직원이 어디 있는지는 저보다 총독부 나으리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수현 "그 친구, 공권력을 이용해서
강압 수사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서 조사 중입니다.
부하 직원의 실책을 수습하는 것도 저의 책임이니까요."
여경 "종로서에서 나온 뒤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수현 "선우완이라는 사람과는 정말 연인 사이가 맞습니까?"
여경 "취조는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
수현 "취조가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여경 "개인적인 관심이라뇨?"
수현 "뭐..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고,
여경씨 개인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겠죠.
두 사람 정말 연인 사이가 맞습니까?"
여경 "우리 사이를 다시 설명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까?"
수현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라도 있습니까?"
여경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가증스럽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거짓으로 사람에게 접근을 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를 이용해 감시를 하지 않나,
내가 왜 그런 사람한테 내 시시콜콜한 연애사를 이야기 해야 하죠?"
수현 "제가 거짓말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요."
여경 "기억이 없어요? 그때 분명 제가 뭐 하시는 분이냐 물었을 때!"
수현 "알게 되면 실망하실 거라고 대답했었죠."
수현 "신분을 속인 적 없습니다.
좀 더 친해지면 말씀 드리겠다고 했을 뿐이지."
완 "이 여자랑 더 이상 친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수현에게 보란듯이 여경의 어깨를 감싸며 도발하듯 말하는 완
의문의 삼각관계 구도에 놀라면서도 흥미로운 영랑
완 "이번 기회에 분명히 경고해두겠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같은 일로 이 여자를 힘들게 하면
저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겠습니다."

완 "영화 상영에 늦겠어. 그만 가지, 나의 뻐꾸기."
당황스런 표정의 여경을 끌고 그대로 나가버리는 완
완 "영화 보고 나서 어디 야외로 드라이브나 갈까 우리?"
일부러 들으라는듯이 대놓고 수현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치는데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 수현과
호기심 가득찬 영랑의 시선
굳은 표정으로 그저 앞만 보며 운전하는 완
여경 "갔어요, 갔어. 들키는 줄 알고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네."
여경 "아니 근데 어떻게 알고 그때 딱 나타났어요?"
여경 "연애는 조국 해방 투쟁의 가장 강력한 위장전술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 말을 온 몸으로 절감했습니다 진짜."
여경 "아! 저기 저 앞에서 차 돌려서 저는 서점 앞에 다시 내려주세요."
그대로 지나치는 완
여경 "어? 여기서 돌려야 한다니까요! 어디 가는 거예요 지금?"
완 "드라이브 간댔잖아."
여경 "그 사람 이제 가고 없다니까요?"
완 "없어도 가."
여경 "이 분이 진짜! 가려거든 저는 서점 앞에 내려 주고 혼자 가세요.
영랑씨 공부도 아직 안 끝났고 야학 수업도 준비해야 되고.."
완 "그냥 좀 따라와 주면 안 되냐!"
ㅇㅅㅇ
완 "어디 가는 거예요, 뭐하는 거예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언제까지 그럴거야 도대체! 꼭 그렇게 이유가 필요해?"
완 "가면 가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괜히 화풀이하는 완의 버럭에 아무 말 못하는 여경
.
.
.
영화 "옷은 마음에 드세요?"
사치코 "뭐... 그럭 저럭이요. 근데 매번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조선에서는 뭘 받으면 딱 그만큼 뱉어내야 한다던데?"
영화 "어우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 너무 섭섭해요 사모님."
사치코 "알았어요. 그럼 사주는 거니까 고맙게 입지.
디자인은 좀 후지지만."
사줘도난리
영화 "저, 근데 미유키상이 경성에 온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사치코 "신랑감 후보랑 맞선도 보게 할 겸 해서 운은 떼어 놨어요.
선우상도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라고 하세요."
사치코 "아참, 그런데 선우상이
여러 여자 울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혹시 바람둥이 계열인가? 나는 그 계열은 못 참는데?"
영화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아들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요즘에 보기 드문 순정파.."
그 순간 두 사람 앞으로 지나가는 완의 차
사치코 "선우상 정말 실망이군요! 여자 보는 눈이 아주 저질이에요!"
영화 "사모님! 사모님!"
한껏 기분이 상한 채로 굳은 표정의 사치코
영화 "근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사모님은 어쩌면 그렇게 젊어 보이세요?
이런 말 참으로 외람되지만
미유키상이랑 자매지간이래도 믿겠어요."
사치코 "자매지간은 무슨. 가끔 그런 얘길 듣긴 하지만."
영화 "네에, 그러실 거 같드라구요."
사치코 "뭐 한때 내가 사교계를 주름 잡긴 했죠.
남편을 만나기 전에 내 얼굴 한번
보고 가겠다고 집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경찰에게 잡혀간 청년들이 기십은 될걸 아마?"
영화 "대단하세요.. 참! 자서전은 잘 진행되고 계세요?"
사치코 "적당한 출판사를 물색해놓으라고 명령해놨어요."
영화 "어머, 그러세요? 그럼 우리 완이 다니는 출판사는 어떠세요?"
사치코 "선우상은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영화 "젊지만 워낙 속이 깊어서 공부하는 틈틈이
선배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객원기자로.
이참에 저희 아들하고 함께 일하면서
친해져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사치코 "출판사 이름이 뭐죠?"
.
.
.

코우지 "월간 지라시의 뜻이 뭐지?"
탁구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팔다리 지, 붙잡을 라, 시선 시.
지.라.시. 온몸을 붙잡는 시선이라고요."
테이블에 놓인 지라시를 펼쳐 완의 기사를 보는 수현
코우지 "그거 말고 숨겨진 뜻이 있잖아!
땅 지, 햇빛 없을 라, 때 시!
이 땅에 빛이 없는 시대, 즉 식민치하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상징한다고 떠들고 다녔다며!"
탁구 "아니 제가 술김에 농담으로다가.."
코우지 "농담? 농담으로 그런 악질 발언을 해!"
탁구 "제가 머리가 홱까닥 돌아가지고 그만.."
수현 "의도적인 혐의도 없어 보이는데 그만 내보내시죠."
코우지 "무슨 소리야! 대일본제국을 우습게 아는
이런 놈들은 따끔한 맛을 봐야!"
수현 "훈방조치 시키라는 우에다 과장님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테이블 위에 지라시를 탁 집어던지고 승질내는 코우지
핵초췌
세기 "으이그 사무실도 완전히 쑥대밭이 됐더구만,
형도 폐인 다 됐네 다 됐어! 나쁜 시끼들!"
왕골 "형 이거 먹어. 형이 생두부 싫어한대서 계란 입혀서 부쳐 왔어."
탁구 "고맙다.. 넌 참 섬세해.."
두부를 먹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면
탁구에게 의미심장한 사인을 보내는 마모루
이상함을 감지하는 둘
세기,왕골 "뭐어? 자서전?"
탁구 "응. 자기 부인 자서전만 써주면 폐간은 막아주겠대."
세기 "이거 뭔가 구린데? 뭐 다른 얘기는 없고?"
탁구 "아무한테도 소문 내지 말고 절대로 절대로 비밀리에 진행해야 한대.
그리고 말이야, 책이 완성되더라도 절대로 발간하지 말래. 절대!"
왕골 "그게 뭐야? 그럼 책은 뭐하러 만들어?"
세기 "잠깐잠깐잠깐만.. 보안과장 싸모라면.. 설마 그 악명 높은 사치코?!"
끄덕끄덕
왕골 "설마 하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됐다..
세기,왕골 "형, 미쳤어!!!???"
탁구 "안 그러면 폐간시킬 거라는데 어쩔거냐..!"
왕골 "수많은 출판사 중에 왜 하필 우리야 왜!"
세기 "나 안 해! 나 못 해!
차라리 누드화보집을 찍으면 찍었지 죽어도 못해!"
탁구 "한 가지 다행인건..
그 여자가 우리 완이를 무지무지 이뻐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거지."
?
!
세기 "아이고 참. 우리 완이가 참 여러모로 쓸모가 많어."
완이라는 비책의 등장으로 갑자기 여유로워진 세 사람

세기 "완아! 엉아들 왔다!"
왕골 "문 열어라. 엉아들이 끝내주는 일거리 따왔다!"
영랑 "완이 오라버니 지금 방에 없어요."
왕골 "영랑아, 완이가 어디 갔는지 이 오빠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영랑 "완이 오라버니 여경 언니랑 같이 영화보고
드라이브까지 하고 오면 꽤 늦을 걸요?"
세기 "완이가 누구랑 뭘 해?!"
.
.
.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완
살벌한 완의 기색을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경
여경 "저.. 저기.."
완 "재수 없게 진짜!"
갑자기 운전대를 팍 치며 혐성 부리는 완의 행동에 놀라는 여경
완 "겨우 생각을 정리했는데 왜 자꾸 끼어드는 거야.."
여경 "아.. 안 끼어들겠습니다. 계속 생각 정리하십시오."
수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완의 심경을 모르는 여경은
자신한테 하는 말인줄 알고 계속 눈치만 보는데
탁구 "완이가 여자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갔다?
그건 곧! 오늘이 바로 디데이란 소리지."
왕골 "어쩌면 해화당 서점 앞에 버려졌던 그날
이미 만리장성이 쌓였는지도 몰라."
세기 "그렇다면 벌써 이별 여행?"
왕골 "여자를 꼬셔 품에 안은 다음엔 이별!
그게 바로 선우완의 연애 법칙 아니겠어?
내기의 끝이 보이고 있어. 세기야 너 옷 벗을 준비해둬야겠다."
세기 "에이 아니야~ 마자씨의 절개가 그렇게 쉽게 꺾일 리가 없어!
아니 막말로 그 날 최마자씨도 같이 있었잖아?
내가 딱 그런거까지 다 계산해서 시나리오를 쓴건데."
왕골 "그날 못 쌓았으면 오늘 쌓겠지. 옷 벗어 임마!"
세기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천하의 조마자씨가 늦은 밤까지 짐승같은 남자와 함께 할 리 없다고!"
탁구 "차가 고장나서 발이 묶인다면 얘기는 또 달라지지."
세기 "무슨 소리야! 완이 차 쌩쌩 잘만 나가잖아!"
그시각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갑자기 멈춰 서는 완의 차
다시 시동을 걸어보지만 걸리지 않고
여경 "왜 그래요? 왜 안가요?"
완 "아이씨.. 기름이 떨어졌어. 이렇게 멀리 나오게 될 줄 몰랐거든."
여경 "뭐에요? 그럼 집에는 어떻게 가요!"
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진짜!"
차에서 내려 본네트를 열어 살펴보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고
완 "뭐해? 내려서 밀어!"
여경 "예에!?"

왕골 "희망을 버려 세기야. 완이 승부근성 알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차 하나 고장 못 내겠냐?"
세기 "좋아, 그래! 차가 고장났다고 치자.
근데 마자씨가 어떤 사람이야?
어떠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서라도 집으로 돌아갈 위인이야!"
세기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져 발이 묶인다면은.. 그래 뭐 그럼 모르지!"
세기 "근데 오늘은 날씨도 이렇게 화창하잖아!"
그 때 실내까지 뚫고 들어오는 우루루 쾅쾅 요란한 천둥번개소리
쏟아지는 빗속에서 끙끙대며 차를 밀고 있는 여경과 완
여경 "어디까지 밀고 가야 돼요?"
완 "민가가 보일 때까지!"
여경 "보일 생각을 안하잖아요!"
완 "보여. 보일꺼야!"
여경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매사에 그렇게 즉흥적입니까?
행동을 할 땐 앞뒤 판단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맞말이라 할 말이 없는 완
여경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차를 출발시키더니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습니까?
왜 그렇게 사람이 감정적입니까!"
여경 "제가 몇 번을 말했습니까, 서점으로 돌아가봐야 한다고.
영랑씨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공부하러 왔다가 그냥 돌아간 야학 아이들은 또 어떻구요."
여경 "저는 드라이브나 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완 "그럼 날더러 어쩌라고!"
여경 "어쨌든 저는 오늘밤 안에 경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완 "내가 일부러 그랬냐? 그럼 이 차를 내가 이고 가리? 업고 가리!"
완 "어차피 오늘은 여기서 못 가! 그냥 옷도 말릴 겸 여기서 머물자."
여경 "제 정신입니까? 민가도 안 보이는데 어디서 묵는단 말입니까!"
완 "저기서!"
완이 대충 둘러보다 무심코 가리킨 곳을 보면 그저 낡은 폐가

탁구 "그렇지, 이야기의 흐름상 언제나 늘!
숙박업소의 방들은 딸랑 하나!
그렇게 젊은 두 남녀는 밀폐된 공간 안에 갇히게 되는 거지."
완 "별로 쾌적한 공간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으아아악!"
여경 "왜 그러세요?!"
지포 라이터를 켜서 살펴보니 그냥 거미줄이고
여경 "무슨 남자가 거미줄을 무서워해요?"
별거 아니라는듯 대충 손으로 거미줄을 둘둘둘 감아서 버리는 쿨여경
완 "무서워서 그러냐! 기분이 나빠서 그렇지!"
그래놓고 또 벽에 걸린 빈 자루들이 흔들리는 모습에
소리지르며 놀라자빠지는 완
여경 "에이 진짜! 무슨 남자가 겁이 그렇게 많아요!"
완 "넌 무슨 여자가 그렇게 겁이 없냐!"
에취-
완 "뭐야, 감기 걸린 거야? 안 되겠다. 일단 젖은 옷부터 벗어서 말리고.."
여경 "돼.. 됐습니다. 그냥 이대로 말리면 됩니다."
완 "어련하시겠습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무서운거 없는 애니까 잠깐 혼자 있어도 괜찮지?"
여경 "당신이랑 같이 있는 게 더 무섭습니다."
완 "이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
완이 나가고 번쩍거리며 울려대는 천둥소리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양손으로 귀를 막고 주저앉는 여경
탁구 "완이의 작업가방 알지, 니들도?"
탁구 "완이가 여자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가서 그 가방을 열었다?
그럼 십중팔구! 여자들은 전부 완이한테 넘어가는 거야!"
가방을 열면 들어있는 와인병과 와인잔, 양초 등등
여자와 함께 분위기를 잡을 때 쓰는 각종 무드템들
여경 "이게 다 뭐예요?"
완 "내 비장의 무기들이지!"
여경 "비장의 무기?"
완 "언제 어디서 작업에 들어갈지 모르니 비상시를 대비해 상비.."
여경 "?무슨 작업이요?"
완 "어쨌든! 봐봐!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잖아.
촛불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여경 "그러네. 이쁘다아.."
완 "마셔. 와인이야."
여경 "됐습니다. 저는 술은 안 마십니다!"
완 "누가 취하래? 약으로 마셔둬.
몸이 좀 따뜻해질 거야. 아까부터 계속 떨고 있잖아."
완의 말에 갈등하는 여경
탁구 "와인과 촛불.. 분위기 잡는 데는 최고지.
그것이 설령 당장 무너질 것 같은 폐가라 할지라도."

탁구 "촛불에 흔들리는 그녀의 유혹적인 실루엣,
와인 잔에 아롱지는 그녀의 뇌쇄적인 미소가.."
왕골 "형, 조마자씨가 그런 스타일은 아닌 듯 싶은데?"
탁구 "시끄러! 창작의 세계를 건드리구 있어.
어쨌든 알콜의 향기가 뜨거운 청춘을 자극하는 순간,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거지."
탁구의 소설 속 오묘한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취한 듯한 여경과 황당하다는 표정의 완
완 "너 진짜 경제적인 인간이다. 어떻게 와인 한 모금에 인격이 변하냐?"
여경 "네? 제 인격 말입니까? 하하하하."
여경 "나는요! 술 마시는 거 싫습니다!
왜냐면 마음이 약해지니까.
무서워도 불안해도 억지로 참고 있던 걸
참지 못하게 될까봐 무섭습니다."
완 "니가 무서운 게 다 있냐?"
여경 "네에. 무서운 거 많습니다."
여경 "경찰도 무섭고 고문도 무섭고 취조도 무섭고,"
여경 "쫓기는 것도 무섭고,"
여경 "숨는 것도 무섭고, 들킬까봐 무섭고,
연행 당하는 것도 무섭고,"
내비치지 않던 속마음을 술김에 털어놓는 여경을 빤히 보는 완
여경 "어머니 눈에 눈물 나게 할까봐 무섭고,
내가 과연 흔들리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까 무섭고.."
여경 "무엇보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무섭습니다.."
완 "천둥 소리도 무서워하잖아 너."
여경 "아닙니다! 천둥 안 무섭습니다!"
완 "안 무섭기는. 아까부터 천둥소리만 나면 달달 떠는구만."
여경 "아니라니까요! 그딴거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완 "오후 내내 차를 밀었더니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여경 "설마 여기서 자겠다는 말입니까?!"
완 "그럼 저 빗속에 나가서 노숙하리?"
여경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한 방에서.."
완 "이봐, 우린 공식적으로 함께 밤을 보낸 사이야.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위증죄로 잡혀간다 나?"
여경 "그.. 그럼 제가 차에서 자겠습니다."
완 "그러시든가요 그럼."
나가려는 순간 쾅하고 울리는 천둥소리에 소리지르며 주저앉는 여경
완 "내가 졌다 그래. 내가 졌어."
작게 한숨 쉬며 나가려는 완의 옷자락을 움켜쥐는 여경
여경 "실은 천둥소리 무서워합니다. 나가지 말아주세요.."
.
.
.
"언제 다 같이 공이나 치러 가지."
"난 햇볕에서 땀 흘리는 건 딱 질색이야. 여름엔 밤낚시가 최고지."
" 하여튼 저 친구 올빼미 체질이라니까.
밤에 하는 건 다 좋아하잖아. 술, 여자, 마작.
그런데 그보다 돈을 더 좋아하지. 하하하."
"이거 왜 이래? 난 돈보다도 우리 송주를 더 좋아한다구."
송주 "정말요? 고맙기도 하셔라."
쇳소리하는 고관대작의 시계를 유심히 보는 송주
"그러고보니 칠필살 예고살인 말이야. 그거 범인이 잡혔던가?"
"그거 아직 못 잡았을 걸?"
송주 "비밀 독립운동 조직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까요?"
"사실이면 또 어쩔 거야?
지들이 무슨 구국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설쳐대는데 가당치도 않아.
그런 놈들은 싸그리 잡아다가 총살을 시켜야 돼."
"독립은 무슨 얼어죽을 독립!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선진문물의 혜택을 받는 것도 다 누구 덕인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야."
"하긴 옛날 같으면 서당 근처도 얼씬 못할 천한 것들이
이젠 유학까지 다녀오는 세상이니 참 세상 좋아졌지."
"이렇게 세련되고 모던한 모습의 송주야말로 그 증거가 아니겠어?"
한치 앞을 모르고 완용ed 시전하고 있는 고관대작들과
살풋 웃는 미소 뒤로 분노를 숨기는 송주
근덕 "탐색전은 어땠어?"
송주 "조선 땅엔 치워야 할 쓰레기들이 너무 많아.
칠필살이 아니라 칠백필살로도 모자라겠어."
근덕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수행원도 여럿이고."
송주 "술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성격도 행동반경도 단순해서 타이밍만 잘 맞추면
오늘밤 안으로 해치울 수 있겠어."
송주 "말 나온 김에 오늘 해치워버릴까? 날씨가 딱인데."
자신만만한 송주의 무모함에 절레절레 고개를 돌리는 근덕






명빈관에서 송주를 기다리고 있는 수현이 보이고
송주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을까?
설마 또 임의동행인가요? 아님 취조?"
송주 "지겨워라. 살인자가 빨리 잡혀야 발 뻗고 잘 수 있을텐데."
수현 "십년 전 한 남자가 살해됐습니다."
수현 "피해자는 머리에 둔기를 맞아 살해된 채
다음날 아침 강가에서 발견됐죠."
송주 "추리 소설 이야긴가요?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수현 "읽는 재미를 위해서 힌트를 하나 드릴까요?"
송주 "고맙죠."
수현 "피해자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던 친일파 지주로
살해되던 날 밤 명빈관에서 묵었습니다."
수현 "그리고 같은 날 밤,
명빈관의 동기었던 소녀 한 명이 실종됐습니다.
실종된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수현 "차송주씨. 십년 전, 러시아에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습니까?"
싸늘하게 굳는 송주의 표정
.
.
.
여경 "십년 전, 만주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거니까요.
그래서 나도 울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듣고만 있는 완
여경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처음 울었던 날은,
오늘처럼 천둥이 치던 날이었습니다."
여경 "실은 나 어렸을 때부터 천둥을 엄청 무서워해서
그런 날은 꼭 아버지 품에 안겨야만 잠이 들었거든요."
여경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무서워도 나 혼자 견뎌야 하는구나,
외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나를 품에 안아줄 사람이 이제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왠지 외롭고 서글퍼져서 바보같이 울었습니다.
여경 "근데 이제는 안 웁니다.
아버지와 나는 이제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될테니까요."
여리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은 여경의 다짐과 같은 말들에
마음이 쓰이는듯 가만히 바라보는 완
아침이 밝고 쏟아지는 햇빛
잠에서 깨어 시선을 돌려 옆을 보면
완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곤히 잠든 여경의 모습
'그런데 이제 아무리 무서워도 나 혼자 견뎌야 하는구나.
외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나를 품에 안아줄 사람이 이제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왠지 외롭고 서글퍼져서 바보같이 울었습니다.'
잠든 여경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감싸 안아 자신의 품에 안기게 하는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