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데일리] 10년 넘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릴까.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완화 논의가 정치권과 산업계에서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경기 둔화 속 내수 진작, 소비 활성화, 유통산업의 경쟁력 회복 등이 주된 이유다.

오래된 교과서의 정답 같은 명분이 다시 소환됐다. 그러나 이번엔 그 이면에 다른 그림자가 겹친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파문, 온라인 유통의 신뢰 붕괴, 나아가 대미 통상 마찰이라는 묵직한 후폭풍이다. 지금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완화 논의는 단순한 산업 규제 개편이 아니라, 정치·경제·소비자 심리를 모두 얽어매는 복합 퍼즐이 돼버렸다.
규제 완화, ‘경제 논리’의 귀환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은 2012년 도입됐다. 당시 골목상권 보호와 전통시장 활성화가 정책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10년 동안 유통 지형은 급변했다. 소비자는 주말 오후 모바일 앱 하나로 장을 보고, 신선식품까지 새벽배송으로 받아본다. ‘대형마트 대 전통시장’이라는 구도가 ‘온라인 대 오프라인’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런데도 법 규제는 여전히 과거의 풍경에 묶여 있다. 산업계는 “시대가 바뀌었는데, 법은 그대로다”고 입을 모은다. 대형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의무휴업이 소비자 불편만 키우고, 지역상권엔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체인스토어협회 자료에 따르면, 의무휴업 당일 오프라인 매출만 감소할 뿐, 주변 시장이나 온라인으로 소비가 이전되는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정치권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당은 ‘소비 회복’과 ‘유통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제도 개선을 논의 중이며, 일부 야당 의원조차 “10년 전 논리로 현재 유통을 묶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논의가 힘을 얻자마자 엉뚱한 불씨가 옮겨붙었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다.
쿠팡의 그림자, 소비자 신뢰 '흔들'
지난해 말 터진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유통업 전반의 ‘신뢰경제’를 뒤흔들었다는 평가다. 정부가 추정하는 유출된 정보는 수천만 건에 달했고,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 정보가 해외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까지 이어졌다. 정부는 관계기관 합동조사에 착수했고, 쿠팡을 향한 정치권과 소비자의 불신은 날로 깊어진다.
여론은 미묘하게 갈렸다. “이래서 오프라인이 더 낫다”는 의견이 다시 부상했지만, 한편에선 “대기업 유통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라는 회의론도 팽배했다. 온라인의 신뢰 위기가 곧바로 오프라인 마트의 기회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이렇듯 이번 사태는 역설적 딜레마를 남겼다. 온라인 신뢰는 무너졌는데, 오프라인이 그 대안이 되기엔 여전히 ‘규제의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이다. 마트 규제 완화 논의가 다시 불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최선’보다는 ‘차악(次惡)’의 선택처럼 보인다.
소비자, 편리함보다 '신뢰감’ 선택
유통산업의 무게중심이 기술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소비자는 편리함보다 신뢰를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사느냐’보다 ‘누구를 믿느냐’가 핵심이 된 것이다.
정치권의 규제 완화 논의에도 소비자들은 실제론 냉담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의무휴업 폐지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트가 열리든 말든, 내 소비 여력은 그대로다.”
소비자들의 체감 유통환경은 물가 상승, 할인 마케팅 피로감, 플랫폼 피로감 등으로 이미 복합적이다. 여기에 개인정보 불안까지 겹치자, 시민은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불신의 눈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감시자’로 변해버렸다.
규제 완화 논의에 엉뚱한 변수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대미(對美) 통상 이슈다. 최근 미국은 한국의 대형 유통 규제를 ‘비합리적 시장 장벽’으로 지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정한 시장 접근’을 명분으로, 한국 유통시장에서 쿠팡 등 미국 자본이 차별받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완화는 명백히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대형 유통 자본의 이익과 소비자의 실질적 효용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악’이란 현실적 경로로서의 의미는 크다. 지금 이 제도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뢰와 효율 중 어느 것도 제대로 담보하지 못하는 절충형 규제에 가깝다.
즉, 법의 목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졌다. 유통시장의 중심이 오프라인에서 데이터 기반 플랫폼으로 완전히 넘어간 이상, 제도의 ‘존치 명분’은 빠르게 퇴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논의는 “규제 철폐”가 아니라 “규제 재설계”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신뢰 회복 없는 완화는 공허할 뿐
진짜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신뢰’다. 아무리 문을 오래 열어둬도, 소비자가 그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매장의 불빛은 헛되다. 쿠팡 사태는 단순한 보안 사고가 아니라, 디지털 전환 시대의 신뢰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냈다. 유통산업이 회복해야 할 것은 매출보다 ‘믿음’인 것이다.
이에 정책 당국을 향한 요구도 늘고 있다. 먼저 산업 간 형평성을 고려한 동시대적 규제 체계의 재구성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동일 규율로 평가하는 새로운 시장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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