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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전력 1차) 사계절의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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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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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http://theqoo.net/ani/312991457



여름의 끄트머리, 여전히 계속되는 익을 듯한 더위에, 아지랑이 속 매미들 역시 날카로이 울어대는 와중 여름방학은 끝나버렸다.

그 여름방학은 나의 학교생활 중에서,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부터 있었던 12번쯤의 여름방학들 중 단연 최악이었다.

정-말 무의미한 방학생활이었다. 그렇게 목 매던 대회에 참가하기는 커녕 마이크를 잡은 일 조차 없었다.

개학식 하루 전날,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 스스로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비장하게 방문과 창문을 열어제끼고 시작한 것은 개학맞이 대청소였다.

사실 나는 이것저것 어질러두고 늘어놓는 타입이 아니라 딱히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정리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화책과 음반들만이 잔뜩 꽂혀있는 책장, 그 속에서 찾아낸 것은 누군가가 선물해준 음반이었다. 내가 이 가수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자 그 사람 음반을 갖고있다며 선물해준 것이었다. 오영현이 말이다.

선물받은 것, 그것도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반을 버리는 짓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마음을 좀 독하게 먹기로 했다.

낙서를 끄적인 종이와 악보들만이 가득한 책상에서 발견한 것은 체육대회 때 오영현과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사진 속 웃는 얼굴의 오영현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한 쪽으로 사진을 치워놓았다.

쓸데없는 종이 뭉치를 버리려고 집어들다, 대충 공책을 찢은듯한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
'?'
'심심해'
'공부나 해ㅋㅋ'
'너도 자잖아ㅋㅋㅋ'
'ㅋㅋㅋㅋㅋㅋ그럼 너도 자든가'
'너 짝한테 자리 바꿔달라고 물어봐주면 안돼?'

아, 기억 났다. 이 뒤에 오영현은 오케이 싸인을 보냈고, 자리를 바꿔 떠들다 선생님한테 지적당하고 목소리를 낮춰 떠들었었다. 그 별거 아닌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났지만, 이것 역시 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오영현과 함께 놀러가서 샀던 옷이 보였고, 서랍을 열어보니 커플링을 맞추기 싫다던 오영현과 타협해서 맞춘 커플 팔찌가 보였다.

미술시간에 먹물로 친구의 얼굴을 그려보라던 선생님 말씀에 오영현이 그려준 내 얼굴도 보였고, 떼써서 기어코 한 장 얻어온 오영현의 민증 사진도 보였다.

100일 선물이라며 오영현이 내밀었던 손목시계, 오영현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무슨 향인지 물어 방에 가져다놓았던 디퓨저,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전부 그 녀석이었다.

한 곳에 모아놓은 그 흔적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난 못해, 절대 못해' 라는 말을 뇌까렸다. 괜히 벽에 주먹질을 해 봤지만 내 손만 아플 뿐이었다.

"진하야! 너 뭐하는거야 대체?"

쾅쾅대는 소리를 듣고 급히 온 엄마가 내 방의 모양새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다 뭐니?"

"아니 그냥... 개학 기념 대청소..."

금방 치우겠다며 어이없어하는 엄마의 등을 떠밀고 한숨을 쉬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그것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안아 들고 나가서는 재활용 박스로 거칠게 던져넣었다.

분명 후련해야 할 터인데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오열이라도 했다면 그 정도로 답답하지 않았을텐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 더욱 아팠다.

그렇게 홀로 난리를 치고서,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갔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이었지만.

"오! 박진하다!"

"진하!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냐?"

"새로운 마음으로 2학기를 시작하기로 했지"

"말이 되는 개소리를 해"

"야, 개소리가 말이 되면 개소리겠냐?"

"그건 그렇네, 똑똑한데?"

개학 첫날부터 어김없이 만담을 하는 친구들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았다. 즐겁던 것도 잠시, 가만히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으니 현실이 나를 파고들었다.

여긴 학교고,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되는 옆 분단 이 자리의 주인은 오영현이다. 잊고있던 것이 떠오르니 죽을맛이었다. 고개를 책상에 박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래, 어차피 오래 갈 것 같은 사이는 아니었다. 언제든지 변해버릴 청소년기의 별 것 아닌 감정. 거기에 학업이니 군대니 사회의 시선이니 하는 것들에 부딪혀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끝날 관계였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오랜만!" 이라고 밝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 염색했네?"

"오~~"

"근데 이거 걸릴 삘이라..."

"에이, 설마 개학 첫날부터 잡겠냐"

오영현이 염색을 했단다. 당장 고개를 들어 보고싶었지만 '이성'이라는 친구가 나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가방을 내려두고 의자를 빼내는 소리와 호흡소리, 훅 끼쳐오는 체향에 난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기로 했다.

자다가 방금 깨어난 척,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자 소리가 멎었다. 저 편은 시끄러운데, 이 쪽에만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상황에 내가 고개를 오영현쪽으로 돌린다면, 더욱 어색한 기류가 형성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아는데도 나란 놈은 고개를 돌렸고, 결국 그 눈을 마주보고야 말았다. 그 와인색의 머리는 쓸데없이 잘 어울렸다. 예뻤다, 지독히도 예뻤다. 살짝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칼과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안녕"

그 완벽한 입술에서 인삿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입 맞추고 싶었다. 정말 다행히도 내 이성은 아주 좋은 친구였다.

"어, 염색했네. 잘 어울린다"

그래도 결국 쓸모 없는 소리는 하고 말았다.

"...고마워"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자리에는 아직 향이 남아있었다. 고작 한 번 만난걸로 흔들리는 내가 싫었다. 그로부터 매일매일,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후회 역시 꾸준히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청소같은 헛짓거리는 하지 말걸. 마르고 닳도록 보고 만지면서 추억을 되새기다 잊을 때 쯤에나 버릴걸. 아니, 그 전에 방학식 날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나 말걸.

어떻게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어느새 사라져버린 매미소리가 무더운 여름의 끝을 알렸다.



#어느 가을

"차렷, 공수, 인사"

"안녕하세요-"

반장의 구호에 맞춰 반 전체가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반 자치활동 시간. 고3 수험생이다 보니 보통은 자습인데, 그 날은 담임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셨다.

"너희들한테 전할 말이 있다"

낯선 담임선생님의 진지한 목소리에 학생들이 귀를 기울였다.

"우리반 영현이가 이번에...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밴드 경연대회 국내 예선에서, 1위를 해서! 영국을 가게 됐어"

놀란 듯 터져나오는 박수와 함성. 나 역시 놀라 오영현을 바라보았다. 오영현은 눈을 내리깔고 쑥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회가 단기간에 끝나는게 아니라, 꽤 오래 머무르면서 장기결석을 하는걸로..."

다시 한 번 놀라는 학생들. 나는 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아니 많이 더 놀랐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체육대회 날, 계주로서 뛰었을 때도 그렇게 숨이 찰 정도로 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영현의 장기결석 소식을 들은 그 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엎드려 잤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라고 여기고 싶었던걸까? 그렇게 자고 깨어나면 악몽을 꿨다며 웃는 얼굴로 얘기할 수 있을거라 믿고 싶었던걸까?

종례가 끝나고 나를 깨우는 손길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 마자 "영현이는?" 하고 다급하게 물은 뒤 "아까 나갔는데?" 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뛰쳐나갔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미친듯이 달렸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오영현!"

울부짖듯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폰을 꽂고 걷던 오영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오영현의 앞에 나도 멈춰 숨을 몰아쉬었다.

"너...... 쿨럭!"

"뭐...뭔데?"

얼마간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잔뜩 뛰던 심장이 가라앉은 뒤여서인지 놀라울 만큼 차분해졌다.

"밴드는 언제부터 한거야?"

"여름방학때..."

아, 그랬구나, 나는 반 시체상태로 여름방학을 흘려보내버릴 동안 너는 아무렇지 않게 제 할 일을 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비참해졌다.

"넌 뭔데? 기타야?"

"응, 기타"

"왜....."

왜 얘기하지 않았냐고 물을 뻔 했다. 상관없는 사람한테 얘기할 리가 없는데.

"왜냐니..?"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고"

"........."

오영현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있지 않았다. 전이나 그 때나 다름 없이 나는 홀로 짝사랑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출국은 언제인데?"

"28일"

"이번주 금요일? 사흘 뒤?"

"응"

"왜이렇게 늦게 말했어?"

"일찍 말하면 괜히 애들이 계속 얘기 꺼내고 그래서 더 씁쓸해질까봐 그랬지"

"그래도..."

"오버할 거 없어, 길어봤자 서너달일텐데"

"........."

"나 간다, 내일 보자"

그 날은 분명,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다음날도 점심시간 전까지 엎어져 자기만 했다.

"진하야"

"어?"

"쌤이 너 점심 먹고 교무실로 오래"

"왜?"

"나야 모르지"

어차피 입맛도 없었던지라 남은 급식을 처리하고 대충 이를 닦은 뒤 교무실로 향했다.

"이리 앉아 봐"

"예..."

"....너, 요새 잠만 자는 모양이더라?"

"그건 그런데, 공부는 원래 안 했는데요"

"그래 네가 공부하는 꼴을 보는건 포기한지 오래고, 그냥 걱정돼서 하는 소리다. 남는건 체력밖에 없는 니가 건어물마냥 늘어져있는걸 보니 좀 그래서 말이야"

"아...뭐... 요새 그냥 잠을 못 자서"

"왜? 뭐 고민같은거 있냐?"

"고민...은 없는데..."

"말하기 그러면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고... 니 주변 친구한테라도 말하고 도움도 받고 그래.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쌤"

"왜"

"영현이 있잖아요"

"응, 영현이"

"영국 가는거, 가족 다같이 간대요?"

"아니, 영현이만 가는 모양이야"

"가서도 혼자 생활하고?"

"밴드 멤버들이랑 같이 지내나본데?"

"아아..."

"그래서, 언제 화해할 예정?"

"네!?"

"너네 싸운거 아니었냐? 그렇게 절친하더니 언젠가부터 말도 안 섞고 말이야"

"뭐, 싸운건, 싸운.... 싸웠긴 한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빨리 다 풀어"

".....네"

곧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교실로 돌아가니 어느새 다들 자습실에 가고 없었다.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 앉자 마자 오영현이 교실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혼자 간다며?"

나도 모르게 말을 걸어버렸다. 뱉어놓고 아차 싶었지만 때는 늦었다.

"영국? 어어, 밴드 5명이서"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카톡 창만 들여다보며 대충 대답하는 모습에 속이 상했다. 게다가 밴드 멤버로 보이는 사람과의 지나치게 다정한 카톡 내용에 열불도 났다.

"공항까지는 부모님이 데려다주신대?"

"아니, 출근하셔야되니까... 아빠가 친구분한테 부탁해주신대"

"몇시 비행기인데?"

"9시 반"

"부탁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드려"

"뭐? 왜?"

그제서야 내 쪽을 돌아봤다.

"그냥 그렇게 전해드려. 꼭"

내가 한 소리지만 정말 대책 없는 말이었다. 그 날 집에 돌아가서도 다시 한 번 대책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엄마, 금요일에 어디 안 나가지?"

"안 나가지, 왜?"

"아들이 부탁이 하나 있어"

"네가? 뭔데?"

"그게 말이야..."

불안불안해하며 한 부탁에 엄마는 의외로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주었다.

"그 친구 비행기 시간이 9시 반이라고?"

"응"

"탑승수속 전까지 같이 있게?"

".....응"

"학교는 늦고?"

".....응"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약속이 파기 될새라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니, 엄마가 허락 안 하면 당연히 학교는 제 때 가야지"

"뭐.... 마음대로 해, 네가 언제 그렇게 학교생활 열심히 했다고. 여태껏 결석 한 번 안한게 용하지"

"진짜!? 감사합니다 어머니 효도할게요!"

"효도는 무슨 효도야"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와 동시에 너무 늦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밀려왔다. 이제서야 화해해봤자 몇 달 동안 얼굴도 못 볼 테고,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굳이 통화를 하게 될 일도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오영현에게 한 말을 오영현이 아버님께 전해드렸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누군가 내게 똑같이 말했다면 난 그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이런 저런 고민들에 한참을 뒤척이다 어느 순간 잠은 들었다. 그러다 깨어난 것은 6시에 맞춰둔 알람이 아니라, 그 전에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공격적으로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발신자 이름 없이 번호만 떠있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어째서인지 익숙한 번호의 떠올리려 하다, 문득 언젠가 대청소를 할 때 주소록에서 지워버린 사람의 번호임이 떠올라 잠이 확 달아났다.

"여보세요?"

"어, 나 오영현인데"

"어어, 그래"

"어떡할거야?"

"뭘 어떡해...?"

"니가 아빠 친구분한테 안 데려다주셔도 된다고 전하라며"

"응..."

"전했는데 이제 뭐 어쩔거냐고"

"....집 앞으로 6시 반까지 나올 수 있어?"

"응"

"그래, 그 때 보자"

"알았어"

'말도 안돼'를 수백번도 더 중얼거리며 외출 준비를 했다.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군말없이 진짜 그 말을 전해드리다니, 그리고 나오라니까 나온다니. 내게 있어선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엄마! 준비 다 됐어?"

"아직 좀 기다려, 왜이렇게 급하니?"

엄마를 재촉해 결국 6시 반이 되기도 전에 오영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물론 엄마의 차로.

"너 한동안 영현이 얘기도 안하더니, 이제 괜찮아진거야?"

"...아니, 이제 화해하려고. 아주아주 사소한 갈등이 있었거든"

"일찍도 화해한다"

얼마 후 오영현이 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차에서 내려 짐을 받아 싣고는 오영현을 차에 태웠다.

"감사합니다"

"안녕, 네가 영현이구나? 초면이네"

"네, 안녕하세요"

"잘 생겼네 아주~ 우리 진하가 얼마나 영현이 얘길 하던ㅈ..."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거는 엄마에게 입모양으로 '그만해' 라고 하고서야 엄마가 말을 멈췄다. 그 덕에 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 차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다시 한번 회의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감정은 어느새 하나씩, 하나씩 슬픔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느꼈던 가슴이 꽉 막힌듯한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뭐 해?"

"어?"

"너도 영현이랑 같이 내릴거 아니었어?"

"어? 아!"

엄마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공항에 도착한 뒤였고, 엄마에게 인사를 한 후 둘이서 짐을 나눠들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저기 앉자"

"그래"

짐을 내려두고 의자에 마주보고 앉은 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너무도 무거워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 기억도 안 나는 눈물도 날 것 같았다.

"야"

"어?"

"무슨 생각 하냐"

"딱히 아무 생각 안 하는데..."

"그래?"

추하게 말 끝이 살짝 떨렸다.

"난...!"

정체 모를 응어리가 목에 걸려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지만 괴로워질 뿐이었다. 그 감각이 너무 낯설어서, 눈앞의 사람이 너무 원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내렸다.

"난... 죽을 것 같은데, 넌 아무 생각 없어? 난...! 전에 그 때 이후로.. 아무것도 못하고 폐인같이 썩고 있는데, 넌 아무렇지 않아?"

상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겉도 속도 무너져서 고통 속에 발버둥치는 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비권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건 더럽게 억울했다.

"왜 나만, 왜 나만 이 지랄을 떨고있는건데... 이쯤되면 다 없던 일로 하고 너 하나쯤 쌩까면 되는건데 왜 이러고 있는건데...!"

그런데도 대답이 없어 화를 낼 생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과 마주한 순간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두 눈에 흘러 넘칠락 말락 차올라있던 눈물이 이내 툭 떨어져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뒤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려는 오영현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

"아무 말 없이 가지 말라고. 왜, 너는 왜 우는데. 말은 해야 할 거 아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멱살을 잡아왔다. 내게 지지 않겠다는듯 언성을 높여 화를 냈다.

"지 맘대로 단정짓고! 일방적으로 보지 말자 통보하고! 한 달 동안 잠수탄건 누군데!? 주제에 쓸데없는 말이나 던지면서! 다 없던 일로 하고 편하게 지내려던 사람 흔들어놓은건 누군데!? 당분간 만나지도 못할 사람한테! 이제 와서! 당일에! 이딴식으로 사람 괴롭히는건 누군데!?"

세 번의 질문, 대답은 전부 '나.' 그런데도 내 자존심이란 아주 못된 놈이었다.

"왜 피해자인 척이야!? 니가 한 번이라도 연인처럼 군 적이 있어 나한테? 내가 전부 다 맞춰주다 갑자기 그랬던 이유가 뭔데, 뭐라고 생각하냐고!"

오영현이 다시 소리치려는 듯 숨을 들이쉬는 순간 진동소리가 울려댔다. 묵묵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오영현이, 그대로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놀란 것은 내 쪽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뭐, 뭐?"

"내가 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어서 니가 우리 관계를 끝냈어. 그래서 난 수긍하고 없던 일로 하자 생각하고 연락도 안 하고 말도 안 걸고 조용히 살았어. 근데 니가 갑자기 미련하게 굴면서 괜히 나한테 히스테리를 부려. 그럼 내가 어쩌라고? 내가 어쩌길 바라는데?"

"영현! 왜 전화도 안 받...고..."

네 명의 남자가 오영현을 찾으러 온 듯 했다. 하지만 상황을 인식하고는 한 명이 나머지를 이끌고 자리를 떴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아까와 같은 정적 속에서 오영현의 숨소리만이 귀에 박혔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하던건 이게 아니었는데. 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온 오영현의 목소리는, 화난 것이 아니라 애처로워서. 아까와 다르게 울음이 섞여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미치도록 안타까워서, 마를 것 같았던 눈물이 다시 왈칵 터져나왔다.

두 사람 다 그 뒤로 한참을 말없이 울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럴 때가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사과하고 그동안 밀린 만큼 다정한 말을 건네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는데.

"저기....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곧 탑승수속을 해야돼서..."

"....먼저 가있어 금방 따라갈게"

"어어... 빨리 와"

아까의 네 남자 중 한 명이 바닥에 분해되어 떨어진 오영현의 휴대전화와 배터리를 줍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눈물을 닦아냈다.

"졸업식 날에 올거야"

"...그래"

"그 때 다시 얘기해. 어쩌고싶은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끌고 멀어져가는 그 작은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잔뜩 부은 눈을 비비며 이별이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약속했다. 공항 건물을 벗어나자 마자 몸을 휘감은 찬 바람이 괴로운 가을의 끝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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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맛에 1차창작 하는구나.... 정말 내 취향(공수 관계성, 외모, 성격, 음악취향, 말투 등등)을 1000% 반영하고있고..ㅋㅋㅋㅋ 캐해석같은걸로 고민하는 시간도 줄어들음ㅎㅎㅎ 글고 무엇보다 내가 창조한 캐들이 넘 이뻐 미치겠음ㅠㅠㅠㅠ 우리 진하랑 영현이 많이 애정해ㅠㅠㅠㅠ 내가 그림좀 잘그렸으면 형태도 생성해낼수 있을텐데 곰손이라 아쉬울뿐.. 1D를 벗어나서 2D로 만들어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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