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① (1970년대)
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② (1980년대)
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③ (1990년대)
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④ (2000년대)
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⑤ (2010년대)
일본의 대여배우 오오타케 시노부를 알아보자 ⑥ (완결편)
[번외편] 가수 오오타케 시노부의 노래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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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死んでもいい』 영화포스터 (35세)
이마루를 낳고 약 6개월 후 90년 3월 낭독극 『LOVE LETTERS』로 무대 복귀, 4월에는 TBS 특별 기획 드라마『大竹しのぶのブッとばすぞ物語』로 브라운관에 복귀하지만 육아로 94년까지 6년간 연속드라마는 출연하지 않았고 오직 특별 기획 드라마(=단편)에만 출연해. 91년에는 연극 『人形の家』과 단편드라마, 92년에는 영화『死んでもいい』,『復活の朝』과 단편드라마에 출연했어. 연극『인형의 집』은 지금까지 산마상이 네타로 쓰는 '나 프랑스 사람인지도 몰라!!!'라는 시노부상의 명언ㅋ을 남긴 무대고, 영화『죽어도 좋아』 이시이 타카시 감독의 작품으로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토리노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오오타케 시노부에게 마이니치 영화 콩쿨 다나카 키누요상과 키네마준보 여우주연상을 안겨줬어.(통산 키네마준보 3회 수상)
↑ 전설의 바츠이치 기자회견. 구글링하다가 건진 사진인데 VTR보는 시노부상 표정이ㅋㅋㅋ 언제적 와이드쇼인지 궁금하다는ㅋㅋㅋ
일은 많이 줄였지만 뛰어난 연기력으로 순조롭게 일이 풀렸지만 가정에서는 그렇지 못했어. 산마상은 이마루가 태어나자 본인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줄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시노부상도 그렇게 해주길 원했지만, 시노부상은 가정도 소중했지만 일도 소중해서 어머니/아내로서의 자아과 여배우로서의 자아가 서로 대립했다고 해. 90년 무대에 복귀할때 산마상도 이해했지만 조금씩 어긋난 부부관계는 회복되지 못했어. 몇년전 인터뷰에서 지금의 두사람(50대)이라면 부부가 모든것을 공유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는 젊어서 상대방이 원하는 모든것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헤어졌다고 말했어.
결국 두사람은 92년 9월, 결혼생활 4년만에 이혼하고 각자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혼기자회견에서 전설적인 산마상 유행어, 바츠이치가 탄생했어ㅋ 아이들의 양육권과 친권은 시노부상이 가져서 이마루의 姓은 스기모토가 아니고 오오타케야. (산마상의 본명=스기모토 타카후미) 그렇지만 이혼했어도 아이들하고 산마상하고 자주 만나고, 기념일에는 4명 모두 식사하고, 매번 시노부상 무대에 산마상이 보러오고, 심지어 같이 쇼프로에 출연해서 이혼네타하는 사이ㅋㅋ (나덬은 시노부상이 어떤 아침방송에 나왔을때 진행하던 여자 아나운서가 이혼하면서 전남편이랑 산마-시노부처럼 살자고 약속했는데 실패했다고, 둘은 이혼부부의 롤모델이라고 말하는거 보고 뿜겼던ㅋ)
↑ 『真夏の夜の夢』의 연습풍경과 노다 히데키의 사진
이혼직후 93년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기 위해서 영화 1편, 단편드라마 1편에 출연하는데 그쳤어. 94년에는 런던에서 귀국한 노다 히데키(野田秀樹)의 복귀작 연극『真夏の夜の夢』에 출연했는데 여기서 노다와 연인사이로 발전해서 약 5년정도 동거하다가 헤어졌어. 되게 충격적인게 노다 히데키가 시노부상+아이들이 사는 집에 들어간건데 이 기간동안 산마상이랑 꾸준히 연락했고, 노다와 아들-딸도 사이가 좋아서 아들 학교공부를 노다가 도와줘서 게이오 보냈고, 이마루 데뷔했을때 이미 헤어진 사이였는데도 노다가 메세지보내고 신경써주고, 아직도 노다의 연극에 시노부상이 출연하고 같이 인터뷰한다는 거...
※ 노다 히데키 : 1955년 12월 20일 출생, 도쿄대 법대 중퇴. 일본의 거물 연극 극작가 겸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 미타니 코키 등과 함께 연극계에서 손꼽히는 인물. 80년대 결혼-이혼 한번했고, 2005년 재혼해서 아들 1명이 있음.
↑ 1996년 TBS 일요극장 『Dearウーマン』. 18살 나가세 토모야도 나옴ㅋㅋ (39세)
아무튼 94년에는 6년만의 연속드라마 주연으로 복귀, TBS 화9『ひとの不幸は蜜の味』에 원톱 여주인공으로 출연해서 시청률이나 작품성이나 나쁘지 않은 성과를 얻었어. 95년은 TV/영화보다는 노자와 히사시의 『恋人たちの短い夜』, 노다 히데키의 『野田版・国性爺合戦』,『贋作 罪と罰』 등 연극에 많이 출연했어. 96년에는 히가시야마 노리유키와 공동주연으로 TBS 일요극장 『Dearウーマン』에 출연했고 이시이 타카시 감독의 영화 『GONIN2』로 호치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해. 97-98년도 연극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영화와 단편드라마에 나왔는데 98년에 야마다 요지 감독의 『学校III』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닛칸스포츠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 1999년 출연한 명작 영화들의 포스터들. 왼쪽부터 『生きたい』,『鉄道員 ぽっぽや』,『黒い家』(42세)
99년 故나카무라 칸자무라 주연의 NHK 대하드라마『元禄繚乱』에서 16년만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99년은 영화에서의 활약이 눈부셨어. 우선 1월 개봉한 신도 카네토 감독의 『生きたい』의 여주인공으로 대배우 미쿠니 렌타로와 함께 출연했고 『살고싶어』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어. 신도 카네토 감독은 일본의 1세대 영화감독이자 독립영화의 세계적인 거장인데 평생의 연인이자 배우자, 뮤즈, 페르소나였던 오토와 노부코가 사망한 이후 작품활동을 쉬었다가, 오오타케 시노부를 제2의 페르소나로 삼으면서 작품활동을 재개 2011년 최후의 작품까지 함께해. 참고로 오오타케 시노부의 70년대 대표작 『事件』의 각본도 신도 카네토였어. (쓸데없는 정보지만 『生きたい』는 나덬의 입문작ㅋ)
6월에는 그 유명한 『철도원』이 개봉. 병으로 죽는 타카쿠라 켄의 아내가 바로 시노부상이라는ㅋ 11월에는 공포영화『검은 집』에 출연해서 광기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어. 이런 활약으로 마이니치 영화 콩쿨, 요코하마 영화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통산 3회 수상)을 받았고 대여배우, 연기파 여배우의 면모를 보여주며 90년대를 마무리해. 90년대 활동을 정리하면 초중반은 육아와 가정문제로 활동이 별로 없었다가 9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는데 중년여배우가 되면서 드라마 출연이 줄어들었고 무대 쪽 활동이 조금씩 많아졌어. 영화는 데뷔때부터 꾸준히 활약하던 분야로 여러 대표작을 남겼는데, 이런 활동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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덬들아 메리 크리스마스라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