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까지 국가가 관리…‘개인 선택권 제한, 연금 통제’ 논란
예·적금 빼서 국내채권으로…금융권 집단 반발
장밋빛 8% 수익률, 실제 6%~7%대…수익률 ‘착시’ 지적도
금융업권 "현실적 대안은 ‘의무화’ 아닌 ‘선택형 기금화’"
정부와 여당이 퇴직연금 의무화 및 기금화를 2026년 국정과제로 추진하면서 432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이해관계 충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퇴직연금이라는 '거대한 돈의 흐름'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통제하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둘러싼 구조적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듯 핵심 쟁점은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다. 현재 논의의 중심에는 기존 퇴직연금을 하나의 '대형 기금' 형태로 운용하는 기금화 방안이 있다. 정부는 수익률 제고와 자본시장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금융권은 사업 기반 훼손을 우려하고 근로자들은 선택권 제한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1월 중 당정협의회를 통해 '퇴직연금 기금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공개할 예정이다. 퇴직연금 시장은 2024년 기준 432조 원 규모로, 2019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연 10% 성장만 가정해도 2035년 전후 '1000조 원'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이 막대한 '돈의 흐름'을 정부가 직접 설계하겠다는 의미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은 명확하다. 먼저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이다. 현재 퇴직연금 자산의 상당 부분이 예·적금과 금리확정형 보험에 묶여 있어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이를 기금형으로 전환해 주식·채권 중심의 장기 분산투자를 확대하면 연금의 실질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본시장, 특히 채권시장 활성화에 대한 명분도 있다. 퇴직연금이 전면 기금화돼 '푸른씨앗'과 같은 구조로 운용될 경우 국내 채권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이 대폭 확대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는 장기 자금이 부족한 국내 자본시장 구조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다.
정부가 구상하는 기금화는 완전한 신설이 아니라 현재 상시근로자 30인 이하 사업장을 대상으로 운영 중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이른바 '푸른씨앗'을 확대·공단화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미 국회에 발의된 관련 법안 역시 이 같은 방향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은행·보험·증권·자산운용사에게 퇴직연금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핵심 수익원'이다. 기금화는 이 시장을 정부 주도의 단일 기금으로 흡수하는 효과를 낼 수 있으며 이는 곧 기존 사업자의 역할 축소로 이어진다는 우려다.
특히 은행권은 예·적금 자금 이탈 가능성을 가장 큰 리스크로 꼽는다. 현재 퇴직연금 자산 중 상당 부분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데 기금화가 본격화될 경우 이 자금이 대거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규모 머니 무브먼트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인 셈이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수익률 개선이라는 명분은 이해하지만 민간 금융회사를 배제한 채 정부가 자금 운용을 사실상 독점하는 구조는 시장 원리에 어긋난다"며 "장기적으로는 경쟁 약화와 운용 효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근로자 입장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은 '선택권'이다. 퇴직연금은 노후 대비 수단인 동시에 은퇴 시점에서 개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자산이다. 이를 국민연금처럼 의무화·기금화하는 것은 과도한 개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퇴직연금 기금화의 본질적 배경으로 국민연금 재정 문제를 지목한다. 장기적으로 국민연금 재원이 고갈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퇴직연금을 또 하나의 공적연금처럼 관리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수익률 논쟁 역시 근로자들의 불안을 키운다. 정부와 기금화 찬성 측은 연 8% 이상의 수익률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해외 주요 연금기금과 국민연금의 실제 장기 수익률은 6~7%대에 머물러 있다. "장밋빛 수익률 전망에 개인의 노후 자산을 맡길 수 있느냐"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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