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그외 할머니 기일인데 전혀 슬프지 않은 후기 길고 우울함 주의
2,914 29
2016.10.04 05:44
2,914 29
내가 태어난 순간에 엄마는 죽었다. 아빠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불쌍한 나를 조부모님은 감사하게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거두어 키워주셨다.

이게 내가 초등학교 입학한 순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밥 먹을 때도, 씻을 때도, 학교에 가면서도 들었던 내 비운의 스토리였다. 머리가 좀 커진 뒤 알게됐던 진실은 엄마는 내가 생겨서 억지로 결혼은 했지만, 아직 인생 늦지 않았다 생각했는지 젖도 한 번 물려주지 않고 집을 나갔고, 아빠는 답답하고 고지식한 그 집을 견디지 못 해 자유롭고 싶어 집을 나갔다는 거다. 할머니는 온통 막걸리 냄새를 풍기면서 복수를 해라, 니 애비 찾아서 짓밟아버려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알고 있느냐, 니가 죽을 때까지 효도해라, 라고 일주일에 두세번씩 연설했다. 어릴 땐 맞아, 꼭 그럴 거야. 나는 할머니가 하라는대로 아버지한테 복수도 하고, 꼭 은혜를 갚을 거야. 했다.

할머니는 수시로 내 방을 뒤졌다. 청소를 해준다는 이유로. 책상 서랍, 책장, 가방, 옷장, 옷장 위, 방 가운데 살짝 일어나는 장판 아래까지 다 뒤졌다. 친구에게 받은 편지가 있으면 내 눈 앞에서 찢어버렸다. 이런 거 주고받을 시간에 공부를 해라! 양면이 깨끗한 A4용지가 있으면 그건 가져가고 뒷면이 빈 전단지, 포장용지, 이면지 등을 줬다. 원래 공부는 힘들게 해야 잘 되는 거다! 이런 종이는 웃어른이 쓰고 너는 이런 걸로 공부하면 된다! 이틀에 한번은 그랬다.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모든 집이 다 그런 줄 알았다.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들은 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중 1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사무소에 가서 일명 깽판을 부렸다. 이 늙은 나이에 어린 손녀 데려다 키우는 불쌍한 노인들인데, 어떻게 나라에선 쌀 한 톨 지원을 안 해주느냐. 그걸 학교에서, 소위 좀 노는 애한테,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그거 니네 할매할배라매? 니 부모 없는 고아가? 라는 말과 비웃음과 함께 들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집은 못사는 편이 아니라 오히려 잘사는 편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각각 주택이 하나씩 있고, 달달이 세를 받았고, 냉장고와 창고엔 늘 과일이 끊이지 않았다. 근데도 할머니는 폐지를 주우러 다녔다. 이래야 동네에 우리 어렵게 산다고 소문이 난다! 정말로 그때까지는 할머니를 부끄러워 하는 내 자신이 철이 없고 나쁘다 생각했다.

고 1 때, 중학교에서 늘 전교 5등 안에는 들던 내가 처음으로 전교 50등 밖으로 떨어졌다. 인원수가 많은 곳으로 가니 그만큼 잘하는 애도 많았던 거다. 할머니는 56등짜리 성적표를 보고 손톱깍기로 내 허벅지 안쪽 살을 찝었다.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 등수 받고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노. 나가 디지지. 니 사촌동생은 전교 1등 했다 카더라. 가서 가 똥 받아 무라. 그래서 나는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정말 잘할테니까, 전교 1등이라도 할테니까, 공부하게 해주세요. 허벅지 안쪽에서 흐르는 피가 종아리에 다 젖도록 무릎을 꿇고 학원 가고 싶어요, 빌었다. 내 진심은,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나가있고 싶었다. 공부를 하면, 집중을 하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아무것도 안 들리니까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집에서 멀지만 정말 저렴한 단과학원에 보내줬다. 그리고 나는 그 학원 강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집에 가기 싫어서 강의가 길다고 거짓말을 하고 학원 자습실에 남아있다가, 강사에게 질문을 하러 갔는데 교무실에서 강제로 당했다. 나는 그게 큰일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유일했던 친구에게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선생님이 자기 무릎에 잠시 앉을래? 했어. 싫어요, 왜요? 하니까 팔을 잡아당기고 뒤통수를 때렸어. 교복 가디건이랑 조끼랑 셔츠랑 다 벗기려고 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발목을 잡고 치마를 올렸어. 선생님이 날 눌러놓고 바지를 내렸어. 다 들은 친구가 울었다. 나 대신. xx야, 이거는 범죄고 신고해서 그 선생님이 처벌받고 니가 사과 받아야 할 일이야. 내가 같이 해줄게. 했다.

그렇게 내 소중한 고 2 시절에 재판을 했다. 어쩔수 없이 보호자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알계되셨다. 무릎꿇고 우는 나한테 할머니가 말했다. 밑구녕에서 피는 질질 싸는 년이, 니 같은 거 하나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앞길 창창한 저런 훌륭하신 선생님이 경찰에 잡혀? 니가 멋진 분 인생 조진 거다! 나는 법원에서 제의한 정신과 검사에서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약을 먹고, 혹시라도 내가 어느날 갑자기 자살할까봐 담당 검사님과 담임선생님이 나를 늘 감시하듯 지켜봤다. 재판 과정에서 나는 남자 경찰, 남자 변호사, 남자 판사, 남자 검사, 남자 담임선생님 앞에서 내가 성폭행 당한 과정을 수도 없이 말했다. 사건 장소인 학원 교무실까지 같이 가서 내가 상황 설명도 몇 번이나 했다. 첫번째 재판 때, 숨이 넘어갈 듯 울고 거품까지 물고 나서야 초임 여자 검사로 바꼈다.

아무튼. 그 모든 일을 겪고 난 뒤, 성적은 바닥을 쳤다. 소위 수준 높은 대학을 노리던 내가 지방대를 보게 됐고, 그 기세로 수능을 봤다. 성적은 암담했다. 할머니는 수능을 치고 나온 나에게 졸업하면 공장에 가라, 여자는 대학 가면 시집 못 간다, 했다. 요즘 시대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6.25 직후에 갖혀있었다. 나는 그 말들에 반박을 할 힘 같은 건 없었다.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집에서 나왔다.

야반도주를 했다. 졸업식 전날이 발렌타인 데이였는데, 얼굴도 모르고 살던 아빠가 집에 왔다. 할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욕을 하고, 할머니가 빗자루를 휘두르자, 아빠가 화장실 거울을 깨고 할아버지를 손바닥을 찔렀다. 피 한방울 안 날 정도로 스르륵 스치기만 했는데, 할아버지는 나 죽는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이 싫었다. 20년 가까이 살며 처음 본 아빠도 아빠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하룻밤의 싸지름으로 생긴 나를 딱히 그쪽도 달가워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껏 그래, 이런 집안 환경에 집을 나간 아빠가 오히려 현명해. 했던 내 생각들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진저리가 났다. 지긋지긋해서, 단 몇시간이라도 더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밤, 옷 몇 가지만 챙겨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다. 내 10대의 모든 상처들이 아물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 별 거 아닌듯 그냥 떠올리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런 내 과거를 말한 적은 없다. 정신과 상담을 받았을 때조차.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것도 아마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휴대폰 가게를 하고 있는 고모에게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지 딱 6년이 됐다. 안 슬프다. 처음부터 안 슬펐다. 사람이 죽었다고, 한 때 20년 가까이 같은 집에 살았고 나를 키워준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그저 무덤덤했다. 지금도. 그치만 1년 중 하루는 이렇게 모든 것들이 다 생각이 난다.

너무도 선명하게 생각이 나서 잠도 못 자고 생각에 빠져있는 내 스스로가 너무 힘들어서 넋두리 겸 긴 글을 썼다. 내년의 오늘이 되면 아마도 나는 이 글을 찾아서 보겠지. 그때는 아무렇지 않은 것보다 오늘이 그 날이다, 라는 걸 기억 못 했으면 좋겠다.
목록 스크랩 (1)
댓글 29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더샘🧡] 차분함에 생기 한 방울! 드뮤어 · 뉴트럴 · 뮤트 · 모카무스 · 미지근 · 멀멀 컬러 등장 ✨젤리 블러셔 5컬러✨ 체험 이벤트 475 03.19 36,614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357,612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5,941,821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279,935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211,956
모든 공지 확인하기()
179532 그외 Adhd덬들 잘 자는지 궁금한 후기 1 02:23 188
179531 그외 통매음 고소한 중기 00:40 627
179530 그외 8개월 동안 13kg 감량한 후기 5 03.21 956
179529 그외 10년 넘게 스타벅스 보이콧 중인 중기 9 03.21 847
179528 그외 집에 애착인형이 하나 있는데 솜을 갈려면 어떻게해야하는지 궁금한 초기 7 03.21 722
179527 그외 안경 구입한 후기 5 03.21 960
179526 그외 밤낮 바뀐거 고치려고 조조영화를 예매한 후기 4 03.21 784
179525 그외 청약 해지/중단/지속 할지 궁금한 중기 6 03.21 639
179524 그외 정신과 초진가기 무서운 중기 4 03.21 444
179523 그외 직장인 파트타임 대학원생 중 일부!!! 가 진짜 너무 싫은 후기 3 03.21 901
179522 그외 길냥이 입양센터가 원래 이런건지 궁금한 초기 4 03.21 728
179521 그외 질세정제 크리노산 후기가 궁금한 초기.. 3 03.21 503
179520 그외 브라질리언레이저 2년동안 20번받은 후기 7 03.21 1,271
179519 그외 가족한테 큰 상처를 받았는데 이대로 넘어가야하는지 고민하는 중기(내용 ㅍ) 6 03.21 1,455
179518 그외 생리통 심해서 생리기간이 너무 힘들고 아까운 중기 5 03.21 573
179517 그외 벌레 박사덬들의 도움이 간절한 초기 (사진주의) 9 03.21 885
179516 그외 장염이 전염성이 있는지 몰랐던 후기 13 03.21 2,200
179515 그외 모교에 기부한 후기 23 03.21 1,534
179514 그외 아기들 애착인형 뭐 사줬는지 궁금한 초기 31 03.21 1,110
179513 그외 처음으로 너무 좋아했던 결혼약속했던 남친이랑 헤어지니까 극복이 안되는 중기 16 03.21 1,7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