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56334?sid=001

여성의당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연 ‘국민청원 심사 무기한 연장 결정 규탄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손푯말을 들고 있다. 장종우 기자
“5만2190명 모으는 일이 쉬운 줄 아십니까? 겨우 청원을 올리면 뭐합니까? 국회에서 미뤄버리는데…”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여성 ㄱ씨는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회가 청원 심사기간을 연장했다는 소식에 “원통하고, 억울하고, 허무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1인시위까지 하며 5만명 이상의 동의를 끌어낸 청원은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었다.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 등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하는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상대방 동의가 없거나 의사에 반해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1월 말 접수한 ㄱ씨 청원 심사 기간을 2026년 5월 말로 늦췄다.
여성의당은 이날 ‘국민청원 심사 무기한 연장 결정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비동의 강간죄 도입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사학재단 비리 척결과 여대 존치를 위한 사립학교법 개정 △학교 내 성폭력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호제도 개선 △교제폭력처벌법 입법 등 5개 청원의 심사 기간이 연장됐다고 밝혔다.
2019년 도입된 국민동의청원이 시민 의견을 입법에 반영한다는 취지와 달리 유명무실하게 운영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두루뭉술한 사유로 심사기간을 연장하며 대부분 폐기 수순을 밟는 탓이다. 국민동의청원은 누리집에서 30일 동안 5만명 이상 동의를 받은 청원이 국회 상임위원회에 자동 회부되는 제도다. 국회법 제125조에 따라 상임위원회는 회부된 날로부터 최대 150일 안에 심사하고 그 결과를 국회의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다만 같은 법에서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 위원회 의결로 심사 기간 추가연장을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여성의당이 제기한 5개 여성 관련 국회 동의 청원도 5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지만, 상임위원회 의결로 심사 기간이 늦춰졌다.

국회의장이 보낸 국민동의청원 심사기간 연장 안내. 사진 여성의당 제공
국회는 “심도 있는 심사”를 심사기간 연장 사유로 설명하지만, 심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상임위원회는 국민동의청원을 심사하기 위한 청원심사소위원회를 둔다. 그런데 학교 내 성폭력 피해자 보호 제도 개선 등을 다루는 국회 교육위원회는 올해 한 번도 소위원회를 연 적이 없다. 4월 청원 심사기간 연장을 의결하면서 김영호 위원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이 국회에 요청한 것이니 굉장히 엄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신속한 심사를 요청했으나 소용없었다.
청원자들은 심사기간 연장이 청원 폐기로 이어질 거라고 걱정한다. 국회의원 임기에 맞춰 임기가 바뀌면 기존 청원을 폐기하고 다시 5만명 이상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어서다. 국회사무처 통계를 보면, 지난 20대 국회 땐 207건 가운데 166건(80%), 21대 국회 땐 194건 가운데 161건(83%)이 각각 폐기됐다. 그나마 20대 국회에선 4건이 채택됐지만, 21대 땐 한 건도 채택되지 않았다. 동덕여대 재학생 ㄴ씨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국회가 교육위원회 요청으로 사학재단 비리 척결과 사립학교법 개정 청원 심사 기한을 2028년 5월29일까지 미뤘는데, 사실상 청원을 폐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원 입법은 의원들 의지에 달렸다. 차인순 국회의정연수원 겸임교수는 “국민동의청원 가운데 입법이 필요한 사안은 법안심사소위원회로 넘겨 같이 의논하는데, 의원이 유사한 법안이라도 발의해야 함께 다뤄진다”며 “최초의 국민동의청원이었던 텔레그램 디지털성범죄 방지 청원도 여러 의원들의 법안 발의가 있어 논의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진숙 여성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듣기 곤란하고 불편한 내용을 거르는 현재 청원 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며 “반드시 청원 성립 6개월 이내 심사하도록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