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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스물다섯살 태어났더니 레즈인 후기
39,011 20
2017.03.19 22:37
39,011 20

어디부터 시작해야할까.

시간의 순서대로, 내가 남들과 같진 않구나 느꼈던 그 첫번째 이야기부터.


*

사랑도 우정도 모르던 어린이집 시절이다.

매달 생일인 아이들은 꼬깔콘을 올리고는,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지은 그 얼굴의 양 볼 위에

이성친구가 뽀뽀를 하는게 월례였다.


내 생일은 7월.

확실치 않은 기억으로는 그 달 생일인 아이는 나를 합쳐 2명이었다.

생일잔치가 마무리되갔다. 뽀뽀하러 다가오는 친하던 남자아이 한명과, 꽤 귀엽던 다른 남자아이 한 명.

나는 도망쳤다. 뽀뽀가 싫다며, 부끄럽다며.

한참을 그렇게 도망쳤더니 선생님도 아이들도 포기했는지 결국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왈가닥에 워낙 선머슴이던 나였기에 '친구'인 남자아이에게 뽀뽀 받는다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

그땐 아이돌이 유행했다.

주변엔 온통 잘생기고 멋진 남자아이돌을 좋아하는 애들로 가득했다.

동방신기 5명의 생일을 모두 외운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잘생긴 오빠를 좋아하지 않는 애는 없었다.

나도 그래야 했다.

"무명아, 너는 누구 좋아해?"

"응 나는..."

나는 FT아일랜드가 좋았다. 이제 막 데뷔한 라이징아이돌이었다.

갑작스럽게 한 대답치곤 최고였다.

그렇게 나는 FT아일랜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만 누구에게도 관심없으면 이상하니까.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지로 이사했다.

핸드폰 대중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기에, 고향 아이들의 번호는 기껏해야 한둘. 그마저도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남중으로 진학을 한 남자아이. 내 초등학교 친구.

"그거 알아? 나 그때 너 좋아했어."

지금 수련회 왔다며, 캠프파이어중이라는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

돌아돌아 아무개가 널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화이트데이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초등학생치곤 꽤 커다란 사탕을 책가방에서 발견해도,

골목대장 노릇하던 그 때에 많은 남자아이들이 항상 곁에 있었지만

놀라울만큼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고 생각했다.


예쁘장하고 성정이 부드럽던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이 갔다.

그건 '친구'로서 관심이었다. 굳게 믿었다. 나는 그런 애가 아니니까.



*

웹툰 어서오세요305호에를 보고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윤설에피만 10번 넘게 봤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나는 '무성애자'이다. 남자아이를 좋아한 적 없었으니까.



*

친구를 만나러 타지에 가서 버스를 탔다.

버스 자리가 나자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여자.

뒷목에 얼핏 보이는 타투와 단발머리, 그리고 뿔테안경

예뻤다.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

고3,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고백을 받았다.

같은지역 대학을 다니던 오빠.

취미도, 성격도 정말 잘 맞았다.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오래 알고 지내고 싶던 오빠였다.

한 번도 연애상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거절했고

왜 멋대로 나를 좋아하는지 화가났다. 왜 맘대로 고백해서 우리 사이를 망쳐?


다른지역 대학에 다니던 귀엽게 생긴 언니와 셋이서 자주 놀러다니곤 했었다.

나는 그 언니가 좋았다.



*

나는 취직을 했다.

대학을 갈 형편이 안됐다.


회사 연수에서 만난 오빠가 고백을 했다.

고3 그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잘 맞고 좋은 오빠였는데 예상치 못한데에서 고백을 받아 당황했다.

남이 되기 싫어서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세네번 더 애매한 관계로 만나고는

연락이 끊겼다.


사실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어 고기 사주며 축하해줄 수 있다.

노트북 사는데 같이 가줄 수 있다.

오빠차를 타고 드라이브 할 수 있다.

새벽까지 술 먹고 술깨기 위해 심야영화를 단둘이 볼 수 있다.


영화 화면에 집중했다.

정말 재미없는 영화였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그 오빤 계속 나만 보고 있었다.

힐끗힐끗 그 오빠를 쳐다봤다.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만 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많이 취했구나,

영화가 정말 재미없구나,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곤 다음날 고백받았다.



*

똑같이 연수받으며 만난 언니가 좋았다.

나는 이제 확신했다. 나는 동성애자구나.

그 언니는 정말 예쁘고, 정말 착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지금도 물론.


내가 엄청 들이댔다. 친해지고싶었다. 같은 여자니까 이상할건 없었다.

그렇게 우린 친해졌다.

그 언니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여자니까. 친한 동생이니까. 남자친구가 있지만 곁에 남을 수 있었다.

언니는 항상 말했다.

"너 빨리 남자친구 만들어! 커플끼리 같이 놀러다니자 ㅎㅎ"


나는 항상 언니가 우선이었다.

언니는 항상 남친이 우선이었다.

억울했다. 내가 남자친구보다 더 언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억울했다. 화가났다.

나도 밤에 언니랑 커피 마시고 싶었다.

나도 단둘이 가맥집에서 한잔 하고 싶었다.

나도 둘이서 차 타고 수목원 놀러가고 싶었다.

나도 언니 볼에 뽀뽀하고 싶었다.

나도 세상 사랑스러운 언니의 그 표정 받고 싶었다.



*

안지 5년정도 된 오빠가 전화가 왔다.

나름 데이트도 한 적 있고, 썸도 탔다고 생각했다.

반년만에 온 연락에 나는

곧바로 고백했다.

오빠, 나 오빠 좋아요. 우리 사귈래요?


그렇게 첫 남친이 생겼다.



*

이 사람이면 괜찮겠지.

여자가 좋지만, 남자도 좋아할거야. 분명. 문제없을거야.


좋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착했다. 난 착한 사람이 좋았다.

3달을 가지 못했다.


손 잡았다.

볼에 뽀뽀를 받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싫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됐기에 다시금 귀여운 표정으로 바꾸었다.

내가 먼저 뽀뽀하기전에는 하지 말라고 했다.


입술에 뽀뽀를 받았다.

축축했다. 애벌레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싫었다. 정말정말정말 싫었다. 짜증났다.

울고싶었다. 죽고싶었다.

화냈다.

오빤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미안했다. 우린 사귀는 사이인데... 성인인데 뽀뽀도 안해주면 싫어할거야.


나도 뽀뽀를 해줬다.

정말 싫었다.

다신 입술을 맞대지 않았다.


우린 헤어졌다.



*

나는 양성애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던 생각은

그렇게 완전히 지워졌다.

나는 동성애자다. 다신 남자를 만나지 않을거다.



*

언니는 여전히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

가끔 싸운 후에 연락이 온다.

내심 기쁘지만, 나는 위로해줄 수 밖에 없다.


"괜찮아, 그래도 좋은 사람이잖아. 다시 만나봐."


'이제 나랑 좀 더 만나주면 안돼? 나는 화날 일 없게 할 수 있어.'



*

어느 순간부터 불안해진다.

카톡이 짧아지고, 연락도 뜸해졌다.

눈치챈건가? 내가 너무 티냈나? 부담스럽나?

의도적으로 연락을 줄였다.

사흘을 가지 못하고 다시 연락했다.

왜 너랑 대화하면 그렇게 허세를 부리는지,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너에게 모든걸 주고 싶다.

너와 어울릴 것 같은 목도리를 샀다.

너에게 주지 못했다.

네가 좋아하지 않을까 텀블러를 샀다.

너에게 주지 못했다.

네가 갖고싶다던 무드등을 샀다.

너에게 전하지 못했다.


눈치챌까봐. 더이상 다가가기 겁이 났다.



*

보고싶어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여러번 거절당했다.

너는 항상 바쁜 듯 했다. 모두가 널 좋아하니까, 항상 약속이 많았다.

나는 네가 1번이었다.

너는 내가 1번이 아니었다.

그게 너무 슬펐다.


먼저 약속잡지 않을거야, 다짐했다.

나도 약속을 거절해볼거야, 다짐했다.


좀처럼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고

결국 내가 먼저 연락했다.

"그날은 조금....."

오늘도 바람맞았다.


그냥 친구로라도 좋으니 나를 각별히 생각해주면 한다.

내가 널 좋아하는만큼만, 아니면 그 반절만큼이라도.



*

나는 여자연예인이 좋다.

레즈여서 여자연예인이 좋은게 아니다.

"뫄뫄 진짜예뻐 완전좋아"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악의없이.

"너 레즈야?"

그 이후 좋아하는 연예인을 티내고 다니지 못한다.

의심받을까봐. 나는 진짜 레즈니까.



*

게이를 희화한 글을 보면 낄낄대며 웃는다.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가끔 동성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면

미간을 힘껏 찌뿌린다.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짓는다.

'으에엑' 한마디면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항상 남자 소개 해달라는 얘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

남자에 환장한 여자처럼.


소개팅자리가 들어오면, 조건 확인도 안하고 무조건 수락한다.


지금 나는 남자친구가 필요한 솔로이다.

스물다섯에 남친 없는건 흔하니까 괜찮다.


들키는게 무섭다. 기독교인 네가 날 혐오하게될까 두렵다.

남들과 다른 내가 싫다.



*

남친 사귄걸 후회한다.

그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직 나도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거다. 꽁꽁 숨길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무섭다. 너는 왜 연애 안해? 애는 안낳을거야?

그것보다 무서운건 '쟤 동성애자래. 더러워.', '불쌍해.'

요새 골드미스도 많은데 나도 그러고싶다.

연애는 하고싶다. 그건 용기있어야 가능하겠지.

들킬까봐서 커뮤니티도 찾아본 적 없다. 어플도 검색해본 적 없다.

나는 평생 숨길거다.


내가 바라는건

남동생이 나처럼 동성애자가 아니길.

예쁜 아이와 결혼해서 예쁜 아이 낳길.

너라도 우리 부모님께 슬픔 주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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