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호와 5촌 관계인 이서진
(진성호 아버지와 이서진 할머니가 남매)
이서진 할머니 진성호 아버지 남매의 아버지인 진희규의 정체
진희규는 일제강점기 대구 달성군 지역의 대지주, 대자본가이자
이를 토대삼아 경제금융인으로까지 성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일제강점기 초반
경상북도 초대 장관(현 도지사)이었던 이진호(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인 경북도지사였던 스즈키 다카시, 후지카와 도시사부로의
자문역할을 수행하는 경상북도 참사를 지냈고
자신의 토지를 도로부지로 기부하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 1개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박람회 형식을 빌어
조선 산업의 진흥과 장려를 표방했지만
실은 식민지 조선의 발전상을 조선인들에 선전하며
일제의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선전 용도였던
경북 물산공진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조선 통치에 앞장섰으며,
대구은행, 경일은행, 경상합동은행, 대구상공은행의 이사 또는 대주주로 활동하며
경제금융인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발 맞춰 토지개량사업의 중심이었던
수리조합사업에도 뛰어들었는데....
달성군의 수성 수리조합장으로 활동하며
만들어 진 곳이 현재 대구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은 수성유원지..
경제금융인으로 성장한 진희규는 조선총독부의 경제금융정책을
말단에서 실행하는 (달성동부)금융조합의 조합장으로도 활동했고
일본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됩니다.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그 자체가 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직에 오른겁니다.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은 진희규의 소감..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던 진희규는 1932년 3월에 열린 중추원회의에서..
일제 침략전쟁의 산물인 만주국이 건국되었으니 조선통치의 큰 성공을 위해
노력을 해달라는 6대 조선총독 우가키의 훈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복음이랍니다...
끝이 아닙니다. 진희규는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박물관 건설비로 2천원을 기부해서
일본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가 출범하고 반민특위에 자수하는 진희규..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친일 동조 비호 세력의 방해와 저항으로
반민족행위자들의 1%도 안되는 자들만 법정에 서고
고작 40명도 안되는 자들이 1년 내지 2년 정도의 징역만을 선고받았고
그마저도 반민법이 폐지되고 효력을 상실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법의 이름으로 면죄부...
진희규도 자수하고 중앙본부로 송치되었지만 반민특위 와해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을리가 없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수록
+) 이서진 친가가 독립운동 이상룡 집안이라서 독립운동가라는 소리 있는데 이상룡 후손이 20촌이상 차이난다고 인터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