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은가? 이건 다르다. 색감이 생생하고 따뜻하다. 마치 꿈처럼.
아마도 내가 세 살쯤 됐을 때인 것 같다. 이미 거실에서 형 무리엘과 미니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형은 여덟 살이었고, 나는 이미 그의 뒤를 어디든 따라다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허리에 밧줄을 묶고 따라다니는" 사이였다.
아버지는 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셔서 소파에 완전히 누워 계셨다. 아버지들이 긴 하루 후에 누워 있는 모습, 마치 400파운드나 나가는 것처럼 누워 있는 모습 알지 않는가?
"아아아... 너무 피곤한데..."
브라질에서는 특유의 자세가 있다. 아버지는 머리 밑에 베개를 두고, 오른팔을 소파 아래로 늘어뜨리고 계셨다. 나와 형이 달려와 아버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빠아아아! 어서요!!!"
아버지는 몇 초간 저항하시다가 소파에서 굴러 카펫 위로 내려오셨다.
"Yesssssss!!!!!"
그러고는 아버지가 소파 밑으로 완전히 굴러들어가셨다. 그는 사라졌고,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휘젓는 두 개의 커다란 팔만 보였다.
"오늘은 골을 넣을 수 없을 거다. 내가 타파렐이니까!"
그때는 월드컵 시즌이었다. 카펫은 우리의 경기장이었고, 소파 밑 틈새는 골대였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은 타파렐이었다. 형은 히발도, 베베토, 호나우도, 둥가가 되었다... 나는 형이 고르지 않은 선수가 되었다. (모든 둘째들의 숙명이다.)

그 기억은 너무 생생해서 냄새까지도 생각이 날 정도다. 소파 냄새,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냄새, 아버지 옷에서 나는 냄새까지.
월드컵 결승전에서 영웅적인 페널티 세이브를 하려고 앞뒤로 흔들리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보인다. 가끔씩 아버지는 소파 밑에서 고개를 내밀고 웃긴 얼굴을 하셨다. 나와 형은 미친 듯이 웃었다.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어제처럼 그 순간을 느낄 수 있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고향에서 대양 하나를 건너 떨어져 있었다. 리버풀에 있었고, 우리는 2020-2021 시즌 중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완전한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사고가 있었고 아버지가 우리 집 근처 호수에서 익사했다고 알려주셨다. 기억나는 건 내가 완전히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는 것뿐이다. 아버지 같은 분이 실제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소위 '남자다운 남자'였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나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골키퍼였다. 우리 DNA에 흐르는 것 같다. 경기장에서 그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돌진해서 얼굴을 공격수의 부츠에 바로 들이밀곤 했다. "네 아버지는 미쳤었지," 아버지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사실이었고, 축구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축구장에서든 실생활에서든,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가 했던 모든 일은 항상 "가족 우선"이었다. 언제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무너졌다. 축구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축구를 한다는 사실도, 우리가 4위 자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도 계속 상기시켜야 했다. 팬데믹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상황은 더 복잡했고, 집에 가는 과정은 악몽이었다.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브라질에서는 코로나가 다시 급증하고 있었다. 의사는 아내가 여행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리버풀에 머물러야 했다. 아내에게는 완전한 고통이었다. 아내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아버지가 아내를 가장 사랑한다고 농담했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나탈리아 말이 맞는 것 같네"라고 말씀하셨다.
아내는 아버지가 갖지 못한 딸이었다. 결국 나 혼자 브라질로 가려고 했다.
그 후 이삼일은 흐릿하다. 다음에 기억나는 것은 우리 집으로 오는 모든 꽃들이었다. 버질, 앤디, 파비뉴, 피르미누, 티아고부터... 계속. 모든 형제들이 보낸 꽃이었다. 모두가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꽃을 보냈다. 팀 동료들뿐만 아니라 펩 과르디올라와 카를로 안첼로티도 위로 편지를 보내주었다. 큰 감동이었다. 10분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배달원이 꽃을 들고 서 있었다.
고통받을 때 그런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그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큰 라이벌일지라도 유니폼 이름 뒤의 사람을 먼저 알아준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위르겐이 나에게 전화했던 것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4위권 밖에 있었고 모든 포인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훈련을 빠져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위르겐은 내게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가지라고 말했다.
"네, 하지만, 하지만..."
"아니, 아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위르겐은 비슷한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내 고통을 잘 이해했다. 그는 나에게 단순한 감독이 아니라 제2의 아버지 같았다. 오리기가 에버튼전에서 골을 넣었을 때 미친 사람처럼 경기장 반을 달려와 내 품에 뛰어든 순간부터 모두가 그것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 클립을 휴대폰으로 보며 매번 웃는다. 하지만 대중이 볼 수 없는 순간들도 많았다. 원정 경기 후 버스에서 진정한 독일인과 진정한 브라질인처럼 맥주로 승리를 축하하곤 했다.
위르겐은 내가 슬퍼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줬고, 그렇게 이해심 많은 감독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리버풀의 방식이었다. 여기는 그냥 다르다. 선수들도 다르다. 당시 팀 매니저였던 레이 호건이 내게 문자를 보내 선수들이 모두 모여 내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도록 장례식에 갈 전용기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출국하려면 귀국할 때 14일 동안 호텔에서 격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돌아와 혼자 2주 동안 호텔방에 갇혀 있을 생각은 힘들었지만, 가장 최악인 부분은 아내가 그 동안 혼자 있을 것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임신 세 번째 삼분기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와 형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고,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통화였다. 우리는 많이 울었지만, 결국 아버지라면 내가 아이들과 그의 "가장 좋아하는 딸"과 함께 머물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들을 보호하길 원하셨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그를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안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하지 못한 말은 없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우리는 페이스타임으로 장례식을 봐야 했다. 형이 장례 전체 동안 전화를 들고 있었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고 울면서 관 앞에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화면 속에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모든 기억과 사랑이 거리를 좁히고, 영원 속에 있는 아버지와 대화하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게 더 전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이미 모든 말을 했다. 남은 것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단지 내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 친구였기 때문이다.
팀 동료들과 클럽이 없었다면, 내 인생의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장례식 며칠 후 훈련에 복귀했을 때, 불현듯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경기장 사이드라인에 과묵하게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시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또는 호수에서 낚시하던 모습, 바베큐 주변에 앉아 치마헤오(브라질 식 마테; 역자 주)을 마시며 5분마다 몇 마디씩 나누던 모습. 또는 98년 타파렐이 그 유명한 페널티 킥을 막았을 때 축하하며 얼굴을 케이크에 던져 박던 모습. 또는 긴 하루 후에 소파에 누워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 타파렐인 척하는 모습...
이런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면 울기 시작했다. 훈련 중에도.
트렌트의 프리킥을 막기 위해 수비벽을 정리하려는데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울지 않을 때도 충분히 어려운데!

하지만 내 팀 동료들은 놀라웠다. 그들은 한 번도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도 내 가족의 일부이고 함께 슬퍼했다. 다시 훈련할 수 있게 된 것이 나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항상 축구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인 것, 이미 뼛속에 있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우리가 타는 파도다. 경기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내게 평화를 가져다준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나는 파도를 타고 고요한 물로 갔다.
훈련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너무 피곤했다. 아버지처럼 소파에 눕고 싶었다. 다리를 올리고, 한 손에 치마헤오를 들고, 머리 밑에 베개를 두고. 그리고 매일, 시계처럼 정확하게, 내 아들 마테오가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로 달려와 공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Let's playyyyyy!!!"
그는 다섯 살이고, 축구를 사랑한다. 우리는 그가 철자를 아는 것을 알게 된 방법은 유튜브에 들어가서 검색 기록 표시줄에서 본 것이었다...
'livrpol’
‘hi liit liverpol’
‘livrpool dad save’
‘liverpool vs meelan’
‘all we need is alisson becker song’
(마지막 것은 내 딸 헬레나를 위한 것이다 - 그녀는 매일 아침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마테오는 점점 더 나아져서 마침내 리버풀의 철자를 올바르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늦은 밤에 하는 챔피언스 리그 경기 동안 자러 가게 하면 너무 화를 낸다. 완전히 삐져버린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하는 첫 번째 일은 유튜브에서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았다.
"어젯밤에 비겼어요."
"그래? 그랬니?"
"네, 그들이 골 넣고 우리도 골 넣었어요. 아빠 사랑해요."
그러면 항상 바닥에서 놀 시간이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아빠는 골키퍼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소파 밑을 골대로 사용하다가 결국 그는 우리에게 "진짜" 골대를 사게 했다. 우리는 미니 골대를 소파 앞에 두고, 내가 바닥에 누워 아버지가 나를 막으려고 했던 것처럼 그를 막으려고 노력한다.
카펫은 우리의 경기장이다. 내 아들은 모하메드 살라, 트렌트, 비니시우스 주니어가 된다. 나는 항상 타파렐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알리송이어야 한다.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 넓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개월 후, 내 아들 라파엘이 태어났다. 아내와 나에게 그것은 마치 희망이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우리 삶에 다시 빛이 비추었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히브리어에서 온 이름으로, "하나님이 치유하셨다"라는 뜻이다. 라파엘이 태어난 지 6일 후,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웨스트브롬과의 중요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위해 싸우고 있었고, 그 경기에서 이겨야만 했다. 아무것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날 중 하나였고, 마지막 몇 초를 남기고 1-1이었다. 골키퍼로서, 그런 순간에는 그저 페널티 박스 안에 서서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코너킥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 골키퍼 코치가 내게 경기장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잃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빨리 달려갔고, 트렌트가 코너킥을 차려는 순간 박스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면, 골키퍼로서 자신이 실제로 골을 넣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박스에 들어가서 혼란을 일으켜야지.
그 다음 내가 알게 된 것은 공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살짝 돌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다음 나는 따뜻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이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두가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티아고는 나를 안고 울었다. 피르미누는 나를 안고 울면서 동시에 웃고 있었다. 살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위아래로 뛰면서 축하했다. 다른 사람이 골을 넣은 후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하하!! 완전한 기쁨이었다.
팬들의 함성 없이 빈 경기장에서 여전히 경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특별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 해준 팀 동료들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벤치 전체, 스태프, 키트맨 모두가 너무 크게 응원해서 마치 다시 콥들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봤던 것이 기억난다. 그날은 영국의 그런 회색빛 비 오는 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게는 하늘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이건 당신을 위한 거예요, 아버지!
탈의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앉아 부츠를 벗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봤을까? 지켜보고 있었을까?"
나는 신앙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인생의 후반부에 왔다. 어렸을 때, 우리는 "집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었다. 부모님은 매일 기도하셨지만, 교회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먼 하나님을 믿었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삶을 경험하며 - 기쁨과 고통 모두 - 하나님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앙은 볼 수 있거나 심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나 슬로건보다 더 강력한 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다.
축구에서 가장 강력한 노래의 첫 구절을 들을 때마다 이것을 생각한다.
"When you walk …. through a storm…."
전 세계에 5,000개의 다른 축구 노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노래는 단 하나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말로 삶의 더 깊은 의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언젠가는 진정한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꿈은 흔들리고 날아갈 것이다. 당신은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들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길 바란다. 손에 치마헤오를 들고 영원의 해변에서 그를 보길 바란다. 그리고 예전처럼 함께 낚시를 갈 수 있을지도. 많은 말 없이, 그저 물을 즐기면서.
그날까지,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나는 결코, 결코 혼자 걷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4년 동안, 내 팀 동료들, 코치들, 친구들, 이웃들은 나와 내 가족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부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도 안다. 내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매번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내가 400파운드나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다른 방에서 마테오와 라파엘의 발소리가 들려올 때도.

"아빠아아아!!!"
"너무 피곤해..."
"골키퍼 해줘야 해요!!!"
"OK, OK, OK."
나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구른다.
"Yesssssss!!!!!"
(내 딸 헬레나는 우리가 놀 때 그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아이들이 달려올 때마다, 내가 카펫에 누워 손으로 골대를 지킬 때마다, 내가 웃긴 표정을 지을 때마다, 아버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골을 넣을 수 없을 거다. 내가 타파렐이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것이 내게는 신의 메아리다.
YNWA, 알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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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www.theplayerstribune.com/alisson-becker-premier-league-soccer-liverpool-brazil
이탤릭체는 포르투갈어임!
마테오가 유투브에 아빠 검색했다는거 🥹🥹😭😭
먹먹하고 감동이라 가슴 쿵쿵치면서 읽었다 진짜ㅠㅠ
다같이 보고싶어서 스퀘어로 바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