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퐁파두르 후작 부인(프랑스)
루이 15세를 나이 들어서까지 사로잡은건 높은 교양과 지적 매력도 컸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높은 확률로 책이나 악보를 보고 있거나 장소가 서재이기까지 하다.
그녀가 남긴 그림을 보면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
심지어 연기와 노래까지 잘해서 프랑스 연극, 성악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녀의 살롱은 당대의 사상가와 문학가가 모이는 지적 향연의 장이 되었고,
당시 사상이 불순하다며 금지되어 있던 진보적인 서적들도 아낌없이 후원하여
수많은 계몽사상 학자들이 그녀의 살롱에서 먹고 살았고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당연히 싫어하는 사람, 시기질투하는 적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궁중 암투와 지략의 달인이라 죽을때까지 총애와 부귀영화를 누리다 갔다.
왕비의 숙소를 타고난 감각으로 센스있게 꾸며줘서 왕비에게까지 인정과 신임을 받을 정도.
국왕은 이런 그녀에게서 헤어나지를 못했는데, 심지어 본인이 나이들어 왕을 모시기 힘들자
루이 15세를 위해 미녀들을 모은 녹원(鹿苑)을 만들어 왕 전용 하렘을 제공,
감탄한 왕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퐁파두르 부인 뿐이다"라며 죽을 때까지 총애를 거두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심하게 의존했기에
왕의 정치적 조언자와 비서 역할까지 겸하는 와중에 왕의 성욕에도 언제나 응해줘야했고
심지어 루이 15세는 퐁파두르가 항상 자기 근처에서 식사하며 남김없이 다 먹기를 요구했는데
억지로 다 먹으면서도 살이 찌지않고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승마를 했다.
게다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왕과 오랜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도 한번도 왕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의 말년에 왕의 애첩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했던 한 귀족 여인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변장을 하고 그 모자의 모습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자신이 낳지 못한 왕의 아이를 낳은 그녀를 상당히 부러워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