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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조카 단종엔 피눈물도 없었지만…런던서 찾은 세조의 ‘부성애’

무명의 더쿠 | 03-31 | 조회 수 55261

‘번역명의집’ 판본 13년간 조사 결과
아들 의경세자 잃고 추모한 글 확인

 

요절한 의경세자를 추모하는 불사의 하나로 간행한 ‘번역명의집’ 권7의 말미에 실린 세조의 어제발 부분. 남동신 교수 제공

요절한 의경세자를 추모하는 불사의 하나로 간행한 ‘번역명의집’ 권7의 말미에 실린 세조의 어제발 부분. 남동신 교수 제공

 

 

세종대왕(1397~1450)에겐 말년 사랑했던 두 손자가 있었다. 하지만 스무살도 넘기기 전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사촌 형제였던 둘은 잇따라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이였다. 4대 세종과 5대 문종의 적장자로 훗날 6대 임금 단종이 되는 이홍위(1441~1457)와, 세종의 차남으로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1417~1468)가 즉위 직후 의경세자로 책봉한 맏아들 이장(1438~1457)의 비극적 인연이다.

 

책봉된 지 2년 만에 건강이 나빠져 시름시름 앓던 의경세자는 직접 간병한 부왕 세조의 정성에도 1457년(세조 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한달여 뒤 세조는 영월에 유배된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참극을 저질렀다. 왕위를 이을 자신의 후계자가 갑자기 죽었는데, 여전히 왕권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조카는 살아 있는 상황을 세조와 측근들은 용인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세자의 병사 직전 사육신과 금성대군 등 왕족들이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된 터였다. 세조는 조카를 잔혹하게 제거하고 주검을 방치하게 하는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한편으론 불심에 기대어 죽은 세자를 더욱 지극정성으로 추모하는 야누스적인 면모를 보였다.

 

런던 영국도서관에서 120년째 소장해온 15세기 세조 재위기의 인출본 ‘번역명의집’ 맨 앞 표지. 남동신 교수 제공

런던 영국도서관에서 120년째 소장해온 15세기 세조 재위기의 인출본 ‘번역명의집’ 맨 앞 표지. 남동신 교수 제공

 

 

실록과 불교사 문헌 등에는 세조가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후 대장경을 비롯한 다수의 불교경전과 문헌을 인쇄하고 펴내어 배포하는 대규모 불사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최근 그 불사들 중 일부 자취가 영국 런던에서 확인됐다. 당시 불사에서 편찬하고 배포했던 12세기 송나라 불교용어집 ‘번역명의집’ 판본을 남동신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가 13년 전 런던 도심 영국도서관에서 확인한 뒤 지금까지 세차례 조사한 끝에, 세조의 어제발과 세조의 명을 받아 신하들이 찬술한 발문 등이 실린 사실을 파악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권력을 찬탈한 뒤 악몽에 시달리고 세자가 횡사하는 등 마음고생을 겪은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불사를 적극 지원했는데, 이런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희귀한 사료가 발견된 셈이다.

 

‘번역명의집’은 12세기 중국 남송시대 보윤대사 법운(1088~1158)이 소흥 13년(1143)에 편찬한 일종의 불교용어사전이다. 7권 1책의 양장으로, 매우 얇은 한지에 관련 용어 2천여개를 분류·해설한 책이다. 첫 표지는 무늬가 없는 녹청색 비단을 둘러 장황했고, 왼쪽 상단에 흰색 제첨지를 붙이고 ‘번역명의집1’(翻譯名義集一)이라고 붓글씨로 책 제목을 써넣었다. 핵심은 권7 말미에 실린 세조의 어제발 부분. 어제발은 왕이 친히 쓴 발문이란 뜻이다. 세자를 잃은 슬픔을 털어놓으면서 추모를 위해 벌인 불사의 내역들을 기록해 놓았다. 세조의 명을 받아 아픈 세자를 간병한 김수온, 한명회 등 신하 8명이 쓴 발문도 들어 있다. ‘번역명의집’은 국내에도 대구 계명대 동산도서관 소장 목판본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을해자본이 전하지만, 세조와 신하의 발문이 실린 건 영국도서관 소장본뿐이다. 국내 소장본에 없어서 전혀 몰랐던 세조의 글씨와 발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번역명의집’ 표제 아래 찍힌 ‘옥경서재’(玉磬書齋) 인장. 옥경서재는 19세기 초 영의정을 역임한 조정 중신 남공철(1760~1840)이 경기 성남에 만년 거처로 지었던 옥경산장의 서재를 말한다. 이 책이 당시 3

‘번역명의집’ 표제 아래 찍힌 ‘옥경서재’(玉磬書齋) 인장. 옥경서재는 19세기 초 영의정을 역임한 조정 중신 남공철(1760~1840)이 경기 성남에 만년 거처로 지었던 옥경산장의 서재를 말한다. 이 책이 당시 3천권 넘는 책을 소장했던 남공철 수중으로 들어갔음을 일러주는 흔적이다. 남동신 교수 제공

 

 

발문을 보면, 세자가 1457년 7월 발병하자, 세조는 신임하던 고관 8명을 시약제신(약을 바치며 간병하는 신하) 삼아 종친들과 간병하게 했다. 온갖 정성에도 9월2일 세자는 죽음을 맞았고, 선친 세종의 유언을 준행해 동궁의 명복을 비는 대규모 불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불사는 ‘화엄경’을 비롯한 대장경 서적과 불교문헌의 간행과 배포로 요약된다. 이때 ‘번역명의집’ 100건을 인쇄했는데, 그중 하나가 영국도서관 소장본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건 실록 등 사서에 전하지 않는 불교서적 입수에 관련한 세종의 유언과 미지의 금속활자 금강경자에 대한 내용을 어제발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친 세종이 8세기 당나라 고승의 선시집 ‘증도가’를 평생 그토록 보고 싶어 해 차남 수양대군(세조)에게 꼭 입수할 것을 유언으로까지 부탁했고, 이를 받들어 단종 재위 시절인 임신년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북경 각지를 수소문한 끝에 구해 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남 교수는 이 기록을 근거로 ‘번역명의집’ 또한 북경에서 함께 구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번역명의집’의 본문 지면에 찍힌 7개 인장 중 하나인 ‘법시지보’(法施之寶). 15세기 의경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책을 100부 찍고 배포하는 법보시를 행한 뒤 이를 기념해 찍은 것이다. 원래 붉은빛의 주문방인이었으

‘번역명의집’의 본문 지면에 찍힌 7개 인장 중 하나인 ‘법시지보’(法施之寶). 15세기 의경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책을 100부 찍고 배포하는 법보시를 행한 뒤 이를 기념해 찍은 것이다. 원래 붉은빛의 주문방인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검게 색깔이 바뀌었다. 남동신 교수 제공

 

 

아울러 세자의 추모 불사를 위해 불교문헌 ‘금강경오가해’ ‘선종영가집’ ‘증도가’의 편집, 교열, 요약 작업도 지시했는데, 세조가 직접 써서 주자소에서 타출하게 한 금강경자란 금속활자를 썼다는 내용도 나온다. ‘번역명의집’ 또한 세조 원년(1455) 명필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한 금속활자 을해자의 가장 이른 판본이란 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연구에도 매우 주목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구한말인 19세기 말 스웨덴 출신의 영국 외교관이 부임지였던 일본에서 미상의 경로를 통해 사들인 뒤 1906년 영국박물관 도서관(현 영국국립도서관의 전신)에 팔았는데, 당시 거래 기록 문서가 그대로 이 도서관에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생략-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98389?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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