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고급 주택가와 명문 학군에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이 감지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룬리(潤日)'라 불리는 새로운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룬(Run)'은 중국어로 '이익(윤택함)'을 뜻하는 글자(潤)의 발음이 영어의 '도망치다(Run)'와 같은 것에서 착안한 은어로, 여기에 일본을 뜻하는 '리(日)'가 결합해 '일본으로 탈출하여 윤택한 삶을 찾는다'는 뜻의 신조어가 되었다.
2022년 상하이 록다운은 이 흐름의 결정적인 방아쇠였다. 언제든 내 자산과 자유가 통제될 수 있다는 공포를 목격한 중국의 자산가들은 '생존'이 아닌 '삶'을 찾아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2023년 한 해에만 1만 3,500명의 부유층이 중국을 떠났고, 잠재적으로는 약 800만 명이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이케부쿠로에서 미나토구로: 주류의 교체
과거 일본 내 중국인 커뮤니티인 '올드 커머(Old Comer)'들이 푸젠성 등 농촌 출신으로 이케부쿠로나 니시카와구치 등 도심 외곽에 터를 잡았던 노동자 계층이었다면, 지금의 '뉴 커머'는 질적으로 다르다.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 출신의 이들은 알리페이나 바이트댄스 같은 거대 테크 기업 출신이거나, 20대 후반에 이미 경제적 자유(FIRE)를 달성한 청년 재력가들이다.
이들은 1억~2억 엔(약 9억~18억 원) 정도의 자산은 "가볍게" 보유하고 있으며, 도쿄 최고의 부촌인 미나토구의 타워 맨션이나 도요스(豊洲) 등지로 거주지를 옮기고 있다.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자본과 두뇌를 겸비한 엘리트 집단의 이동인 셈이다.
이들이 굳이 일본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이민 장벽이 높아진 싱가포르나 아시아계 혐오 범죄가 우려되는 미국과 달리, 일본은 치안이 완벽하고 비자 문턱이 낮으며, 엔저 현상으로 인해 자산 가치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동질감은 이들에게 "일본어는 배우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안도감마저 준다.
'쉐취팡(학구방)'의 상륙: 분쿄구를 점령하다
이러한 '룬리' 현상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곳은 부동산과 교육 시장이 맞물리는 접점이다. 중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유대인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데, 명문 학교 입학을 위해 해당 학군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중국식 '쉐취팡(学区房)' 투자가 도쿄 한복판에서 재현되고 있다.
현재 중국인 커뮤니티와 SNS인 '샤오홍슈(RED)'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는 도쿄대와 명문 학교들이 밀집한 '분쿄구(文京区)'와 '3S1K'다. 3S1K는 세이시, 쇼와, 센다기, 구보마치 등 4개의 명문 공립 초등학교를 일컫는데, 중국 부모들 사이에서는 이 지역에 집을 구해 자녀를 입학시키는 것이 명문대 진학의 '정석 코스'로 통한다.
실제로 해당 지역 학교의 학급 명부를 확인해 보면 중국인 비율이 10%를 넘어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상하이의 살인적인 집값을 경험한 그들에게 도쿄 중심가의 아파트는 여전히 "배추 가격"처럼 저렴하게 느껴지기에, 망설임 없이 매수 버튼을 누른다.
SAPIX에 부는 중국풍: 경쟁의 역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중국의 숨 막히는 입시 지옥과 사상 교육을 피해 일본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일본 내 가장 치열한 입시 학원인 'SAPIX(사피릭스)'로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공립 학교의 수준을 세계 최고로 평가하는 이들은, 자녀들이 수학과 영어 실력을 이미 갖췄으므로 일본어만 보완하면 최상위권 진입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중국식 하드코어 교육관이 일본의 사교육 시장에 이식되면서, 느슨했던 일본 교육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일본의 '유토리(여유) 교육' 세대가 감당하기 힘든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삶이 마냥 평탄한 것은 아니다.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여전히 중국 공안으로부터 "지켜보고 있다"는 식의 전화를 받으며 초국가적 감시의 그늘 아래 놓여 있기도 하다.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숨죽여 지내야 하는 처지지만, 그럼에도 일본은 그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스위트 스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