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인공지능 3대 강국 도약’을 천명한 지 오래지만,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와 저작권을 둘러싼 법·시장 인프라는 여전히 공백에 가깝다. 국회입법조사처가 14일 발표한 'AI 데이터 학습과 저작권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는 현행 구조가 지속될 경우 “AI 산업과 창작자 모두가 손해를 보는 최악의 균형”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술은 이미 거대언어모델(LLM) 경쟁 시대로 들어섰는데, 법은 여전히 CD 불법복제 시대의 틀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이다. 산업계는 규제 리스크 탓에 대규모 투자를 주저하고, 저작권자는 자신의 작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학습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AI, 특히 생성형 AI는 작동 원리상 방대한 텍스트·이미지·음원·영상 데이터를 학습해야 한다. 문제는 이 데이터의 상당수가 저작권 보호 대상이라는 점이다. 한국 저작권법은 저작물과 데이터베이스를 배타적 보호 대상으로 삼고 있어, 대규모 AI 학습은 구조적으로 저작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국회입조처는 이 지점을 “AI 산업계와 저작권자 간 필연적 긴장 관계”로 규정한다. 저작권자 측은 AI 학습이 기존 시장을 잠식하고 창작자의 경제적 이익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산업계는 법적 불확실성 때문에 신기술 개발과 국제 경쟁력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호소한다.
지난 9월 이재명 대통령 주재 ‘제1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정부가 AI 학습 관련 저작물 공정이용 가이드라인과 거래·보상체계 구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해외의 대응은 다르다. 주요국은 이미 AI 데이터 학습 문제를 다룰 최소한의 ‘틀’을 마련해 놓고 그 안에서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는 텍스트·데이터 마이닝(TDM) 면책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이용(Fair Use) 제도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 단일시장 저작권 지침에서 학술·연구 목적의 TDM은 폭넓게 면책하고, 영리·비영리를 불문한 일반 TDM에 대해서는 저작권자가 ‘옵트아웃(opt-out)’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과 일본 역시 비상업 연구나 정보 분석 목적의 TDM을 넓게 허용하되, 저작권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제한된 범위의 자유사용”을 제도화했다.
미국은 저작권법 제107조 공정이용 규정을 통해 AI 학습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공정이용 판단의 네 요소 가운데 AI 학습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용 목적과 성격, 그리고 시장 영향이다. 영리 목적 여부와 함께 원저작물에 새로운 목적·표현을 부여한 변형적 이용인지, 학습과 결과물이 원저작물 시장을 대체하거나 수요를 잠식하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아직 미국에서도 “AI 학습은 공정이용”이라는 명시적 판결은 없지만, 기업과 법원이 공정이용이라는 동일한 틀 안에서 다투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한국은 공정이용 조항은 있으나 판례와 실무가 축적돼 있지 않고, TDM 면책 규정은 도입조차 못 한 상태다.
한국의 공정이용·TDM 논의가 10년째 “반쪽짜리”에 머무는 이유는 분명하다. 2011년 한미 FTA 이행으로 공정이용이 도입된 이후 세 차례 개정을 거쳤지만, 제도가 실질적 안전판으로 기능하기 위한 토대가 부족하다. 공정이용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사법심사에 의존하는 제도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를 정교하게 적용한 판례가 충분치 않아, 기업 입장에서는 “AI 학습이 공정이용인지 아닌지” 법원이 한 번도 분명하게 확인해주지 않은 셈이다. 더구나 공정이용은 개별 작품의 이용을 상정해 설계된 규범이다. 초대규모 데이터셋 전체를 통째로 학습하는 LLM 구조에 그대로 대입하면, 데이터셋 안에서 특정 저작물이 차지하는 비중과 피해를 계량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TDM 입법도 번번이 좌초했다. 21대 국회에서 TDM 면책 규정을 도입하려는 저작권법 개정안이 네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도 법안이 다시 제출됐지만, “면책은 지나친 특혜”라는 시각과 “AI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필수”라는 논리가 정면충돌하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공정이용도, TDM도 어느 쪽도 실질적 안전장치로 기능하지 못하는 진공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사이 시장은 독자적으로 균형을 찾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요 AI 기업들은 법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저작권자와 직접 이용계약을 맺는 ‘계약 기반 모델’로 이동하고 있다. 오픈AI(OpenAI)가 언론사와 음악 기업과 각각 저작물 이용계약을 체결하고, 일부 플랫폼은 저작물 학습 대가를 구독 수익과 연동한 분배모델로 설계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충분한 자본과 협상력을 갖춘 글로벌 빅테크·대기업에만 현실적 선택지라는 점이다. 대량 라이선스를 일괄 구매할 자금, 저작권 단체·미디어 그룹과 협상할 법무·전문 인력, 플랫폼 규모를 활용해 유리한 단가를 끌어낼 협상력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내 중소·스타트업 AI 기업은 이 세 가지에서 모두 밀리고 있다.
창작자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저작권 단체나 미디어 기업과 빅테크가 맺는 ‘번들 계약’의 실제 수익 분배 구조는 불투명하다. 계약 단가와 분배 비율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급된 금액이 개별 창작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환류되는지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플랫폼·콘텐츠 기업·창작자 사이에서 정보와 협상력이 위로만 쏠려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과 같은 구조가 고착되면 빅테크는 계약을 통해 규제 리스크를 우회하고, 중소기업은 규제와 비용 이중 부담에 막히며, 개별 창작자는 시장 바깥으로 밀려나는 3중 구조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이 보는 쟁점의 핵도 이미 바뀌었다. 이제 논점은 AI 학습을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범위까지, 어떤 조건에서 허용할 것인지, 거래비용과 협상력 불균형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 데이터 활용의 투명성을 어떤 수준까지 강제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공정이용과 TDM을 조합해 기본 허용 범위(베이스라인)를 정하고, 그 위에 저작권자의 거부권과 보상권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교하게 따져야 한다. 동시에 표준계약과 요율 가이드라인, 분쟁조정기구 등을 통해 협상력이 약한 창작자·중소기업도 참여할 수 있는 ‘거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어느 모델이 언제까지 어떤 데이터셋을 학습했는지 일정 수준 공개하도록 하는 투명성 의무 역시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국회입조처가 제시한 해법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정부에는 학습데이터 이용대가 산정 기준과 분배 원칙을 명시한 표준계약, 분쟁조정·중재 체계, 데이터 수집·학습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할 세부지침 마련을 주문한다. 국회에는 TDM 면책 규정 도입 여부를 산업 경쟁력과 권리 보호의 균형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검토할 것, 학습데이터 공개 의무 등 투명성 제고를 위한 법적 근거를 정비할 것을 제안한다. 요약하면, AI 학습과 저작권을 둘러싼 불가피한 충돌을 “허용·금지”의 이분법이 아니라 “가격·규칙·투명성”의 문제로 옮겨놓자는 것이다.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된 이상,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분명하다. 공정이용 조항 하나로 모든 AI 학습을 떠받치게 하려는 발상을 내려놓고, 어떤 유형의 학습이 공정이용에 가까운지 최소한의 가이드와 판례를 축적해야 한다. 생성형 AI 시대에 맞게 TDM을 재설계해 데이터셋 단위 허용 범위, 권리자 거부권, 보상 구조를 다시 짜야 한다. 학습데이터 출처 공개와 권리자 통보 의무를 도입해 저작권자가 최소한 “게임이 어디에서, 어떤 조건으로 벌어지는지”라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AI 학습과 저작권 갈등은 겉으로 보면 산업계와 창작자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AI 기술 주도권을 놓칠 것인가, 아니면 창작 생태계를 붕괴시킬 것인가”라는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제도 설계를 잘못하면 둘 다 잃는 길로 갈 수 있고, 투명성과 공정한 거래 구조를 제대로 세우면 둘 다 살릴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AI를 막을 것이냐, 풀어줄 것이냐”라는 낡은 질문이 아니다. 어떤 규칙 아래,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고, 어느 수준의 투명성을 전제로 AI와 저작권이 공존하도록 만들 것인지에 대한 보다 정교한 답이다. 국회와 정부가 산업계와 창작자 모두에게 이제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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