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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어쩔수가없다’,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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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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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신작이 부국제 개막작으로
무한경쟁 시대 속 인류의 블랙 코미디


[헤럴드경제(부산)=손미정 기자] “다 이루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가족이 있다. 행복감에 취한 가장 ‘만수’(이병헌 분)는 가족들을 힘껏 끌어안는다. 결코 놓을 수 없는 행복을 움켜쥐듯이. 그 안에는 사랑스러운 아내 ‘미리’(손예진 분)가, 토끼 같은 자식들이, 가족 같은 강아지들이, 또 무엇보다 어렵게 마련한 집이 있다. 만수는 자신의 이층집이 한눈에 보이는 마당에 서서 직장에서 보내준 장어를 구우며 이 순간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가 이뤄낸 완벽한 삶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미국에서는 도끼질, 한국에선 “너 모가지야”라고 부르는 순간이 만수를 찾아온다. 만수는 더 부려 먹으려 보낸 줄 알았던 장어의 진짜 정체를 깨닫는다. 천직이라 생각했던 제지 회사에서 매정하게 버려진 만수. 가장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떠올리며 그는 3개월 내 재취업 다짐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아날로그의 상징인 종이가 디지털 시대에 설 자리를 잃은 것처럼, 제지밖에 모르는 만수가 설 자리는 더더욱 없다. 만수는 불황 속에서도 잘 나가는 제지 회사의 반장 ‘선출’(박희순 분)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물론 자리가 있어도 문제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빨갛게 잘 익은 고추나무 화분을 들던 만수는 깨닫는다. “좋은 자리는 경쟁이 치열하다”.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한 ‘만수’는 잠재적 경쟁자를 찾아 나선다. 평생을 제지 회사에 몸담아 온 ‘범모’(이성민 분)와 제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던 실력자 ‘시조’(차승원 분)가 그의 눈에 든다. 사람은 넷, 그리고 자리는 하나.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가장은 생계의 위협 앞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만수는 귀밑을 두드리며 되뇐다.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는 잘 만들고 다듬어진 박찬욱식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한 가장의 좌충우돌 재취업기는 유쾌하지만, 그 안에 어둡고 암울한 현실의 단면이 자리한다. 돈도, 명예도 아닌 오로지 취업이라는 목적을 위해 타락의 길을 택하는 만수의 여정은 그저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깝다.


파도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고, 남의 불행을 가만히 지켜보지도 못하는 마음 여린 만수는 가장의 책임과 제지업에 대한 애정에 떠밀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무한경쟁 시대의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꾸만 구르고 넘어지는 만수의 사투는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본 관객들은 각자 자기의 삶, 자기의 직업, 그것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만수의 전쟁은 어설프다. 지나치게 결연하지도, 심각하지도 않다. 구멍이 뚫린 주머니처럼, 결정적인 순간마다 새어 나오는 만수의 빈틈이 저항할 수 없는 웃음을 준다. 자유자재로 비틀어 낸 박찬욱 특유의 언어유희와 유머도 작품의 맛을 더한다.

더할 나위 없는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 맛을 배가 시킨다. 그중 이병헌은 극단적 상황까지 와버린 평범한 가장 만수의 복잡한 마음과, 오랜 시간 같은 업을 사랑해 온 경쟁자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오차 없이 세심하게 표현한다. 작은 표정의 움직임, 몸짓과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만수의 감정과 연결시키는 연기력이 배우 이병헌의 존재감을 또 한 번 각인시킨다.


먼지 하나 놓치지 않은 듯 계산되고 짜여진 박찬욱식 미장센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특히 하나하나 만수의 손길로 완성된 가족의 집은 극에서 하나의 캐릭터처럼 존재한다. 만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수성가한 후 구입한 자가(自家)가 대표적이다. 분재로 가득 찬 온실과 아이들을 위한 그네 등 만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없는 집의 모든 공간은 나름의 역할을 갖고 캐릭터들과 호흡하며 서사의 일부로 역할을 한다. 박 감독과 미술감독이 오랜 시간 찾아다니고, 실내외 공간을 고치고 만들어 재탄생시킨 집이다.

마당에 심긴 배롱나무부터 만수의 온실을 가득 채운 식물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고르고 배치한 것들이다. 40년간 분재 연구를 해온 유수형 교수가 작업을 맡았다. 유독 굴곡진 분재들에는 험난한 환경을 견뎌내고 다시 벼랑 끝에 몰린 만수의 심리를 투영했다. 깜깜한 민수의 상황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알록달록 선명하게 빛나는 가을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박 감독의 각본력과 연출력, 미장센의 시너지는 중후반부 범모의 음악실 신에서 폭발한다. 큰 음악 소리에 파묻힌 대사들은 서로에 닿지 못한 채 사정없이 빗나가고, 각기 다른 인물들의 입장과 감정이 뒤섞여 대사와 몸싸움으로 또다시 뒤엉킨다. 들리지 않는 대사와 몸짓을 치열하게 주고받는 배우들의 연기 합, 그리고 너무도 극적인 상황에서조차 위트를 포개 넣는 연출력이 감탄을 자아낸다.

만수가 말한 그토록 어려운 면접은 그래서 끝이 났을까. 영화는 마지막까지 만수의 이야기가 인공지능(AI)의 시대에 진입하는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음을 관객들에게 주입한다. “우리가 종이를 쓰지 않으면 누가 쓰겠어요”. 범모의 입에서 또 한 번 반복되는 만수의 대사는 단지 영화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종이는 나무의 설 자리를, 디지털에 젖은 사람들은 종이의 존립을, 그리고 기계는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다. 박 감독은 “AI 기술의 발전으로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 혼돈의 상태를 드라마에 녹여내려 했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쓰지 않는 세상. 재취업을 위한 만수의 사투는 예고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웃기지만, 웃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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