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리스크 큰데 어떻게 투자하나”
미국 현지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들이 한국인 숙련 인력을 보내려면 미국 정부로부터 관리자급 주재원비자(L1)를 받아야 한다. 이들은 통상 현지에서 3~5년 정도 일한다. 다만 많은 중소기업들은 L1 비자가 높은 연봉, 체재비, 보험 등 비용이 큰 만큼 E2 비자를 통해 현지에 보낸다. 이럴 때는 영주권 지원을 근로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저렴한 연봉으로 영주권이 나오는 수년간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가진 한국인 인력을 찾을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다만 수년이 아니라 단기로 몇 달간 지내는 경우에는 B1 혹은 ESTA를 통해 일하는 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미국 정부가 주재원비자를 마냥 내주지 않을뿐더러, 나온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이다. 이번 현대차·LG엔솔 급습 사태는 주재원비자 없이 B1 혹은 ESTA를 통해 단기간 일하는 관행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국내 산업계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첨단 전략 제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압박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와중에 이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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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배터리 같은 첨단 제조업은 일반 가전 등보다 공장을 가동하는데 있어 숙련 인력들이 더 필수적이다. 이들은 초기 공장 가동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운영 노하우 등을 전수한다. 국내의 경험 많은 인력들이 주재원으로 부임하거나, 출장을 자주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ESTA를 통한 미국 업무가 막히면 사실상 공장 운영은 어려워진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ESTA를 이용해 출장을 갈 때 입국 거부 사례들이 적잖이 발생하고 있다고 다수의 기업 인사들은 전했다. 이를테면 삼성전자(005930)는 최근 사내 공지를 통해 “(ESTA로 미국을 가면) 1회 출장 시 최대 2주 이내로 일정을 잡고 초과 시에는 해외인사 담당자와 사전에 조율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업들 당혹…“美 근무 방식 바뀔 것”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한국인 직원들보다는 공장 건설 현장의 외국인 인부 등이 다수인 것 같다”면서도 “미국 근무·출장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기 출장이라고 해도 체류 목적에 맞는 비자를 반드시 받고 가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업무 진척 속도는 느려질 게 뻔하다. 산업 현장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딜레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이 다수라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000660)를 비롯해 삼성SDI(006400), SK온 등이 미국 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이다. 미국 당국이 한국 공장을 얼마든지 추가로 덮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건설 인부들의 인건비가 올라가면 추가적인 출혈은 불가피해 보인다.
또 다른 대기업 고위인사는 “미국 내 생산 공장 건설을 계획 중인 기업들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관련 대응이 약할 수밖에 없는 1차·2차 협력사들의 고민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이 인사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불확실성에 이어 걱정거리가 또 늘었다”고 했다.
산업계에서는 결국 정부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장기적으로 한국만을 위한 취업비자 신설을 추진하되, 단기적으로는 추가 단속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미국 정부에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우리 국민의 권익이 부당하게 침해돼선 안 된다”며 유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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