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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죄질 매우 불량" 질타하면서도
정신질환·가족 선처 호소에 '재활 기회'
전날 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벌어진 딸과의 말다툼은 아버지 마음에 앙금으로 남았다. 다음 날 저녁,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커피숍 가자"고 말을 건넸지만 딸은 그 제안마저 거절했다.
그 순간, 묵혀뒀던 분노가 술기운과 함께 폭발했다. 그는 가족이 함께 사는 거실 바닥에 착화제를 뿌리고 라이터를 켰다. 불길은 순식간에 커튼과 벽을 타고 번졌다. 심지어 그는 가스밸브까지 절단해, 자칫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었다.
'현주건조물방화죄'. 사람이 사는 집에 불을 지르는 중범죄에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전경호)는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도, 형의 집행을 3년간 유예했다.
"죄질 좋지 않다"…법원이 본 범죄의 무게
재판부는 먼저 A씨의 범죄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명확히 짚었다. 판결문은 "자신의 딸이 현존하는 상태에서 주택을 방화하였고, 자칫 더 큰 재산적 피해나 인명 피해를 야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좋지 않다"고 질타했다.
특히 "범행 당시 피고인은 가스밸브를 절단까지 하여 고의의 정도가 중하고 결과 발생의 위험성이 더욱 높았다"고 지적하며, A씨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법원을 움직인 3가지 참작 사유
이처럼 엄중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실형을 면해준 데에는 3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재판부는 A씨의 분노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고통과, A씨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에 주목했다.
첫째, 오랜 기간 앓아온 정신질환이다. 법원은 "오랜 기간 앓고 있는 정신질환이 이 사건 범행에 기여한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의 범행이 온전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병적인 심리 상태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한 것이다. A씨 역시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며 "향후 자발적 치료를 받겠다"고 다짐했다.
둘째, 피해자인 가족의 '용서'였다. 보통 방화 사건의 피해자는 가해자의 엄벌을 탄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피해자인 아내와 딸은 법정에 나와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부는 "주변 가족들이 피고인의 선도를 다짐하며 선처를 바라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중요한 양형 이유로 삼았다.
셋째, A씨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A씨는 가벼운 벌금형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 법원은 이번 범행이 A씨의 본성이 아닌, 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질병의 영향이었음을 고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