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 프랑스 / 1887~1968), '샘(Fountain)', 레디메이드, 63×48×35cm, 1917년(1964년 복제)
[문화매거진=최여민 작가] 오늘은 몇 달째 구독만 해놓고 끝내 보지 못한 넷플릭스를 보기로 결심한 날이다. 하지만 30분 넘게 리모컨을 돌려 보아도 마땅히 끌리는 게 없다. 로맨스부터 액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까지 온갖 장르를 기웃거렸지만, 어느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킨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먼지 쌓인 책을 집어 든 나의 선택은 나에게조차도 뜻밖이었다. 정말이지 예측 불가능한 밤이다.
기발하고 엉뚱한 선택으로 주목받는 데는 누구보다 앞서 있던 예술가가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변기를 예술이라며 내민 마르셀 뒤샹이다. 책으로 선회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대담함이다. 뒤샹은 실제 공장에서 생산된 소변기에 사인 하나를 얹어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뉴욕의 한 전시회는 참가비만 내면 어떤 작품이든 전시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하지만 막상 뒤샹이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출하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작품을 거부했다. 결국 전시장에 놓이기도 전에 퇴짜를 맞은 ‘샘’은 오히려 더 큰 주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현대미술 역사상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뒤샹은 누구나 살 수 있는 공산품을 미술관에 놓아 예술의 경계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 평범한 물건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 불렀다. 말 그대로, 이미 만들어져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이라는 뜻이다. 예술가가 직접 그리거나 조각을 통해 새롭게 만든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식이나 변형을 더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게나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을 그대로 가져와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공산품에 단지 사인 하나 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예술에서 사인은 단순한 이름 표기를 넘어, 작품이 ‘진짜’임을 증명하고 그 가치를 높여주는 중요한 표시로 여겨져 왔다. 예술가의 이름은 곧 작품에 대한 보증이자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뒤샹이 ‘샘’에 붙인 사인도 절대 평범하진 않다. 그는 자신의 이름 대신 ‘R. Mutt 1917’이라고 적었다. 이 가짜 이름은 위생도기 브랜드 ‘J.L. Mott Iron Works’에서 따온 말장난이자, 당시 미국 만화 캐릭터인 ‘Mutt and Jeff’에서 유래된 장난스러운 익명성이었다. 그래서 굳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신 익명성조차 하나의 개념으로 활용하며 작품의 일부로 녹여냈다. 이런 태도는 이후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예술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뛰어난 기술이나 거창한 주제보다 작품에 담긴 생각과 문제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의 길을 열어주었다.
뒤샹은 선택하는 행위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 건 생소한 형태의 작품이 아니라, 너무도 익숙한 물건을 예술이라 주장한 그의 과감한 선택이었다. 어떤 이는 변기를 예술이라 부르는 데 분노했고 또 다른 이는 그 단순함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지금도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뒤샹은 변기 하나를 고르는 단순한 선택만으로 예술의 경계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느냐 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넷플릭스 앞에서 망설이다가 우연히 집어 든 책이 깊은 울림을 안겨준 것처럼 말이다. 잠들기 전, 무심코 눌러 읽기 시작한 이 글이 어쩌면 당신만의 ‘샘’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선택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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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최여민의 뮤지엄 노트] 잠들기 전 최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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