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려 권희달
태종이 왕자 시절부터 수행원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박포의 난 때 이방간을 직접 체포, 연행했던, 태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다.
하루는 선공 직장(최하급 관리임)이 태상전(이성계가 머물 궁궐)을 지을 나무를 동강에서 운반하다가 길에서 권희달을 만났다.
그런데 이 하급관리가 나무 운반에 너무 집중을 해서 그런지 권희달을 보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는데 권희달이 이 관리를 몇 대 쥐어 박아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신분끼리 직급의 차이가 있어도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면 안되는 시절이다.
대신에 당사자의 몸종을 잡아 가두는게 관례였다.
태상왕 이성계가 자기 집 만드는데 일하던 관리를 권희달이 패 버렸으니 당연히 이성계는 화가나서 권희달의 집 종 6명을 잡아 가두어버렸다.
태종 임금이 이를 알고 권희달을 크게 나무라면써 옥에다 가두고 태상전에 가서 아버지 이성계에게 빌었다.
태상왕은 체면도 세워지고 하니 태종 임금에게,
“권희달은 왕을 좌우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자이니 없을 수 없다. 이 일을 가지고 논죄하지는 말라.”
하고 용서를 하여 태종은 권희달을 겨우겨우 석방한 것이다.
5년 뒤에 권희달은 또 한번 감옥에 갇혔다.
권희달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가는 중에 길에서 승녕부 판관(5품) 한이(韓彝), 부승 정환(鄭還) 등의 판관들이 술에 취해 몰골이 말이 아닌 권희달을 보고 또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권희달은 자기 몸종을 시켜 이 판관들을 또 매질 하였다. 이번에는 귀향 갔지만 곧 복직한다.
남의 아내 겁탈도 있고 길에서 행패도 꽤 부렸다고 한다. 연회에서 자기보다 직급 낮은 관료들에게 큰 소리 치는 것도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태종은 이 권희달을 귀향 보냈다가도 곧 복직시키곤 했다. 한 때 총신이던 이숙번은 내쳤지만 권희달은 평생 옆에 뒀다.

권희달은 태종 서거 후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도 저 기질을 못 버리고 명나라 관료에게 주먹질을 하고 돌아온다.

이 때는 세종시절이었고 권희달을 벌주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세종은 부왕의 총신을 끝까지 보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해준다.

" 화 낼때는 오랑캐같지만 딴 생각은 안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후 시호는 위려를 받는다. 대개 시호는 좋은 뜻인데 이 사람의 시호의 위는 사납고 강하고 과단하다의 위, 여는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않을 여라고 돌려서 욕하는 시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