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기사를 보면 김 할머니는 1976년 처음 선탄부로 재직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1970년대가 유독 많은 광부가 목숨을 잃은 시기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정말 많았고 여성들이 광업소로 많이 유입됐다. 그들은 석탄더미 속 정탄(精炭)과 돌, 불순물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다큐 인트로 영상에 1970년 텍스트와 함께 선탄부의 사진이 흘러가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정선에서는 (사)중앙진폐재활협회 이희탁 회장님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진폐 환자로 협회에 소속한 여성 광부들의 명단도 받았다. 글도 배우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여성 광부로 취업했지만 문해교육을 통해 지금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전옥화씨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취재원 도움을 받아 춘천에서 3~4시간 걸리는 태백, 삼척, 정선을 수차례 오가며 4개월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각각 다른 부서의 기자들이 힘을 합쳐 맡은 임무를 수행한 덕에 ‘광부엄마’ 연재물이 계속해서 보도됐다.
기사가 연재되며 반향도 있었지만 문제는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작품을 어떻게 풀어갈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어느 날 머릿속에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다큐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전옥화 시인이 읊은 시로 활용하자’였다. 전 시인을 만났을 때 ‘지독한 가난’ 시를 읊어 달라고 요청했다. 시의 내용도 선탄부가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는 느낌이었고, 다큐의 내레이션으로 쓰기에 잘 어울릴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4K와 같은, 영화 같은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아닌 불합리한 진폐법과 생계 끝자락에 선 광부엄마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었다. 전옥화 시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 위해 청춘을 바친 육신이여”란 시에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선탄부의 존재를 한 구절로 표현한 것처럼, 독자들이 여성광부들의 존재를 오랫동안 기억해준다면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충분히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s://m.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56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