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울한 옥살이를 끝까지 치르더라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폭행 누명을 쓰고 구속된 이범석 씨(38). 그의 옥살이는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형기를 다 채운다 해도, 석방을 위해 없는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씨는 광주에서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뒤 전역 후 금융회사 영업직으로 일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남성이었다. 1월 1일에 태어나서인지 성격도 밝고 유쾌해 지인이 많았다.
그의 인생이 뒤틀린 건 2015년 2월의 어느 밤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여성 A 씨가 다친 것을 보고 병원에 데려다준 선의가 화살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선행이 화살로 돌아올 줄이야”

“그날은 아는 형님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A 씨가 찾아왔어요. 3년 정도 알고 지낸 누나였고, 주로 그쪽에서 먼저 연락해왔죠. 가끔 지인들과 함께 보는 사이였어요.”
이 씨는 다음날 출근이 걱정돼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다. 귀가하려던 이 씨의 팔을 A 씨가 잡아끌며 “조금만 더 마시자”고 했다. 이 씨가 이를 뿌리치자 A 씨는 하이힐을 신은 채 휘청이며 철조망을 짚었고, 그 순간 손바닥이 찢어졌다.
이 씨는 급히 인근 병원 응급실로 A 씨를 데려갔다. 밤이 늦어 응급처치만 받은 뒤, 다음 날 아침 다시 병원을 찾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새벽이라 집에 갔다 다시 오기도 애매했던 두 사람은 병원 인근 숙박시설을 찾았다.
“저 때문에 다친 게 미안하고, 손이 불편하니 초진까지는 도움을 줘야겠다 생각했어요. 호텔에선 그냥 잠만 잤어요. 사실 그분이 손을 아파해서 제대로 잠도 못 잤어요.”
다음 날 병원을 재방문한 이 씨는 A 씨의 입원 절차까지 확인한 뒤 출근했고, 이후 A 씨의 부탁으로 과일이나 만화책 등을 전해주기도 했다.
3개월쯤 뒤, 이 씨가 지인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도 A 씨는 갑자기 찾아왔다. “돌아가면서 택시비를 달라고 했어요. 제가 안 주려 하니까 동석한 형님이 대신 줬죠. 그 모습이 좀 불쾌해서 그 뒤로는 연락을 잘 안 받았습니다.”
“연락 없다가… 3년 8개월 만의 고소”
2018년 9월 어느 토요일 아침, 이 씨는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강간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는 연락이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그냥 끊으려는데 A 씨 이름을 댔어요. 황당했지만 그런 사실이 전혀 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받으러 갔어요. 변호사도 없이 가서 있는 대로 말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조사 받은 후에도 이 씨는 크게 걱정 안 하고 지냈다. 하지만 얼마 후 검찰에 송치됐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검사가 ‘혐의 인정하시죠?’라고 물었어요. ‘안 한걸 어떻게 했다고 하냐’고 하니까 검사는 ‘ 기소하면 3년 이상 징역 나올 건데 그때 후회하지 말고 합의 보라’고 하더라고요.”
이 씨는 억울했지만 예의를 지켜 90도로 인사하고 나왔다. 그리고서야 변호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진실 밝혀질거라 믿었는데…“실형”
1심 선고일, 이 씨의 지인 10여 명이 법정을 찾았다. 모두 무죄를 확신했고, 선고가 끝나면 삼겹살이나 먹자고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징역 2년 6개월에 처한다”고 선고했고, 집행유예는 없었다. 이 씨는 귀를 의심했다. “정말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어요.”
판결문이 이어지는 동안 방청석의 지인들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잃었다. 이 씨는 그 자리에서 교도관에게 양팔이 끼워져 수갑을 찼고, 포승줄에 묶여 법정을 빠져나왔다.
“묵직한 수갑을 채우는데 여름인데도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졌어요. 포승줄에 소시지처럼 끌려가는데 그때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 씨는 그 길로 교도소로 들어가 항문 검사를 받고, 전염병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독방에 갇혔다. 좁은 방 안에서 그는 밤낮 없이 울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 안에서 다 흘렸어요.”
“그래도 난 안했어”

이 씨는 구속 후 첫 면회에서 변호사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김 변호사는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많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교도소라는 데가 막상 들어가고 3일만 지나면 스스로가 완전히 무너져요. ‘어떻게든 내보내만 달라, 그러면 안 했어도 다 인정하겠다’면서 합의하고 꺼내 달라고 해요. 이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아요.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합의하고 나오려면 이 씨는 앞으로 “내가 성폭행한 게 맞다”고 인정해야 했다. 김 변호사가 “할 수 있겠냐”고 묻자, 이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살 거면 그냥 살겠습니다. 저는 억울한 건 못 참아요. 끝까지 싸워보겠습니다.”
그 대답은 변호사에게도 큰 힘이 됐다. 김 변호사는 “당사자가 결심해주면, 우리는 그걸 힘 삼아 공격적으로 싸울 수 있어요. 이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된 거죠”라고 말했다.
이 씨는 반드시 억울함을 풀어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2심 “무죄”

반면 A 씨의 진술은 갈수록 모순을 드러냈다. 이 씨는 “A 씨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자기가 한 말도 기억을 못 하더라”고 회상했다.
1심에서 A 씨는 사건 발생 후 3년 8개월이 지나서야 고소한 이유에 대해 “이혼 소송 중이라 양육권을 빼앗길까봐 이혼이 끝난 뒤에 고소했다”고 주장했다. 이 씨는 이 진술을 듣고서야 A 씨가 결혼한 사실조차 처음 알게 됐다.
하지만 2심 과정에서 사실조회 결과가 반전의 열쇠가 됐다. A 씨가 주장한 ‘강간 피해 날짜’보다 1년 11개월 앞서 이미 이혼이 확정됐고, 양육권도 남편에게 넘어간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2020년 6월 열린 2심 선고 공판에는 이 씨의 부친과 지인 등 20여 명이 방청석을 채웠다. 재판장은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라고 선고했고, 그 순간 아버지는 엄숙한 법정에서 손뼉을 쳤다. 이 씨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무죄 받아도 ‘무고죄’ 성립 안되는 현실”
이 씨는 무죄를 받은 뒤 A 씨를 ‘무고죄’와 함께 ‘모해위증죄’(다른 사람을 형사처벌받게 하려고 일부러 거짓말한 행위)로 고소했다. 이는 무고죄가 웬만해선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사법 피해자가 무죄 판결을 받아 무고죄로 고소해도 정작 기소조차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무고죄가 성립되더라도 실형보다는 집행유예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실제 A 씨도 무고죄는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수차례 위증을 한 사실이 드러나며 ‘모해위증죄’는 인정됐다. 재판부는 검찰이 구형한 1년형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형 1년을 선고하고 A 씨를 법정 구속했다.
대부분 선고는 구형의 70~80% 선에서 내려지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재판부 역시 죄질이 매우 무겁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직도 보상 한푼 못 받아

이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동안 소송에 많은 비용을 쏟아부은 탓에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 놓였다. 수감 중에도 월세와 아파트 대출 이자 등이 빠져나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가입해두었던 보험들도 줄줄이 해지되며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이후 김민수 변호사는 이 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남은 법적 절차를 무료로 도왔다.
이 씨는 3000만 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상대가 돈을 지급하지 않아 매년 360만 원씩 이자가 붙고 있는 상황이지만, “돈이 없다”하니 강제집행도 쉽지 않다. 이미 4년째다.
심지어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A 씨 어머니에게서 편지로 연락이 왔는데 사과 한마디 없이 ‘그래도 우리 딸이랑 친구였지 않냐. 한 번만 봐달라’는 식이었어요.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것도 없이 그냥 용서만 해달라는 식이었어요. 저를 찢어 죽일 듯이 처벌 해달라고 하시던 분이…”
“낙인…나와 같은 처지 돕고파”

이 씨가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그의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제가 강간을 저지르고 카메라 촬영까지 해서 구속됐다가, 합의 보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져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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