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에서 재연한 사건 장면 중 일부)
민승호 암살 사건
이 사건은 18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여흥 민씨 가문에서 한자리 차지하던 인물로
이러한 영향으로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초스피드로 승진하여 명성왕후가 왕비가 된 이후에는 이조 참의, 호조참판을 거쳐 판서에까지 올랐음
그러나 민승호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 했는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그의 기세 역시 한 풀 꺾이게 되었고
그리고 운명의 11월 28일,

민승호는 신원 불명의 어느 승려에게 '지방의 한 수령이 바치는 것'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를 받았음
승려는 '이 상자 안에는 복이 들어있으니 바깥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꼭 안에서 열어보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갔는데
당시에 이런 식으로 민승호에게 뇌물을 바치는 사람이 워낙 많았던 터라 민승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무엇이 들어있을 지 기대하고 상자를 열었는데...
이때만 해도 민승호는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음

집이 박살날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발생했음
이 사고로 민승호 본인과 그의 아들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감고당 한산 이씨(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친모) 역시 전신에 화상을 입고 사망, 총 3명이 목숨을 잃었음
갑작스러운 폭발에 쓰러진 민승호는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몸으로 운현궁 쪽을 가르키다가 죽었다고 전해짐
그리고 민승호의 아버지 민치구 역시 사건의 충격으로 쓰러져 앓다가 2주만에 세상을 떠나 3대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었음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지만 이 사건이 영향을 줬음은 부정할 수 없음)
당시 조선은 물론 서양에서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폭탄 우편이라는 범행 수법으로 나라가 충격에 빠졌지만, 정작 왕실에서는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됨
죽어가던 민승호가 운현궁을 가리켰다는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을 지목했다는 것인데, 이는 민승호가 대원군의 실각 과정에서 고종의 편을 들어 그와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임
하지만 대원군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애초에 고종이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음), 도리어 대원군과 면식이 있는 신철균이라는 이름의 문객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을 뿐임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음
다만 당시에는 폭탄 제작에 관한 지식을 접하기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웠음을 생각하면, 분명 조선 왕실과 연루된 사건일 것임
약 100년 뒤 벌어진 김영삼 의원 질산 테러 사건처럼 국가권력이 개입한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지만,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로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이 흡사함
뭐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던 민승호와 민주화 운동가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실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