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미취학 아이들이 공룡과 화석에 꽤나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어린 친구들과 미술 놀이를 할 때 즐겨했던 수업 중 하나가 ‘화석 놀이’였다. 아이들은 점토에 공룡 피규어 발자국을 찍어 굳히기도 하고 뼈 모양을 만들어 색칠해보기도 하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생물을 상상했다.
그 모습에서 나는 화석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 세대와 세대를 잇는 흥미로운 매개체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화석은 시간을 초월한 기록이다. 이미 사라진 생물의 존재와 그 시대의 기후, 그리고 환경까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증언자다. 문득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먼 미래의 아이들은 어떤 화석을 보고 지금 우리의 시대를 상상할까?
환경학자들은 이미 그 답을 내놓았다. 대량 사육된 닭의 뼈와 플라스틱 조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와 지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인류세(Anthropocene)’의 상징이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으로 구별되던 지구의 시대는 자연이 주체였고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층은 천천히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인류세人類世, 이 시대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주체가 되어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인간 활동에 따라 그 속도도 급변할 수 있다. 자연퇴적물이 쌓였던 지층의 흔적과 달리 인류세의 시기에는 닭 뼈와 플라스틱이 지층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닭 뼈 화석은 대량사육을 의미한다. 작고 약한 닭 뼈는 본래 화석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259억 마리에 달하는 사육계들은 몇백만 마리에 불과한 자연 상태에 비해 너무도 많아 결국 지층에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인간의 야식이 지구의 지층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살기 위해 직접 사냥해서 먹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이제 배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시간에 맞춰 먹고, 기분에 따라 먹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혹은 그저 입이 심심해서 먹는다. 식사는 생존이 아니라 위로이고 쾌락이자 소비가 되어버렸다.
이 시점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맹인의 식사(The Blind Man's Meal, 1903)’가 떠오른다. 나는 피카소 삶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청색시대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 또한 청색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피카소는 어릴 적부터 천재로 유명했다. 그의 유년 시절 작품들은 큐비즘으로만 피카소를 접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해줄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미술학교 입학도 빨랐고 유명해지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큐비즘은 20세기 미술사의 판도를 바꾸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평생 최고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청색시대는 그의 화려한 이력 속 그림자 같은 시기다.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피카소는 깊은 슬픔을 느꼈고 그 감정을 푸른빛으로 표현했다. 그의 고통은 예술로 승화되어 청색시대를 지나고 장밋빛 시대와 큐비즘을 거쳐 더 넓은 세계에 도달했다.
‘맹인의 식사’는 작품을 살펴볼수록 조용한 슬픔이 가슴을 친다. 그림 속 맹인은 어둠 속에서 빵과 포도주를 더듬는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는 먹어야만 한다. 음식을 바라볼 수 없고 즐길 수도 없다. 먹는다는 것은 단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절제된 색감, 텅 빈 배경, 말 없는 인물. 모든 것이 생존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작품과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우리는 넘치는 음식 속에서 과식하며 죄책감도 없고 매일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과 음식물 쓰레기로 미래의 지층을 채운다. 한 조각 빵을 간절히 원하던 맹인과 달리 우리는 너무 쉽게 먹고 너무 많이 버린다.
우리는 정말 생존을 위해서 먹는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먹는가.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식탁은 더 많은 생산과 사육을 요구한다. 소, 돼지, 닭을 키우기 위해 쏟아붓는 물과 사료, 배출되는 메탄과 이산화탄소, 깎여나가는 숲, 오염된 땅과 물 등등. 지구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쓸데없이 많이 먹는 인간의 습관이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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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윤나애의 녹색 미술관] 식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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