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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단순해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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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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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20] 고흐에게 농촌은 농촌 이상의 것이었으며, 농부는 농부 이상의 존재였다. 고흐에게 농촌은 도시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이 치유되는 곳이었으며, 농부는 단지 농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는 또 하나의 예술 활동을 실험하는 사람이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나의 꿈들 속에서 '덜 익은 욕심'은 잘 솎아내고 '소박한 희망'만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나만을 이롭게 하는 꿈이라면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저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처럼 내 손으로 가꾸고, 내 손으로 거둘 수 있는 꿈에만 집중하고 싶어진다. 억지로 유전자 조작을 해서 더 많은 수확물을 욕심내지 않고, 독한 농약을 뿌려서 곤충은 못 먹고 인간도 해를 입는 그런 농사가 아닌,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꿈만을 내 영혼의 밭에 뿌리고 싶어진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단순한 밀레의 모작이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해 고흐는 밀레를 훌쩍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과거의 자기 자신도 뛰어넘고 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1888)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1888)

 끝없이 펼쳐진 아를의 평야를 고흐는 '영원'이라 불렀다.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로 온 첫날 '씨뿌리는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 오순도순 산다는 것,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고갱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희망찬 일이었으면, 얼마나 큰 꿈을 꾸었으면 이런 싱그러운 색채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 뽑아 올릴 수 있었을까.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농부를 힘겨운 노동의 주체로 무겁게 그렸다. 밀레가 그린 농부는 성스럽긴 하지만 무겁고 우울한 느낌도 함께 주고 있다. 하지만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빛의 향연, 색채의 춤으로 가득하다. 무거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이미 돋아나기 시작한 희망과 꿈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고흐는 농촌과 농부들을 사랑했지만, 농부들은 고흐를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고흐의 충동적인 행동이나 돌출적인 몸짓이 농촌 사람들에게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의 농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어딘가 불편한 존재로 다가왔다. 끊임없이 논밭과 농부들을 관찰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만 그리는 모습은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고갱과의 감정싸움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고흐는 아를의 농촌 사회에서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아를의 농부들은 그를 배척했지만 고흐는 그들을 혈육처럼 사랑했다. 광부들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던 보리나주 시절, 아직 자신만의 그림체를 확립하지 못했고 아직 성직자의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과는 달리, 아를에서의 고흐는 농부들과 완전히 동화되고 싶어했고 화가 아닌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의 분위기는 낯선 화가의 돌연한 발작과 끊이지 않는 돌출 행동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고흐는 포기하지 않고 수백 점의 농촌 풍경을 남겼다. 그에게 아를의 아름다운 들판은 '영원'의 상징이자 자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캔버스였다.

 특히 아를의 여인들이 지닌 개성 넘치는 표정과 몸짓을 생생하게 그려낸 '아를의 여인'은 가히 '아를적인 것'을 '고흐적인 스타일'로 녹여낸 걸작이었다. 고갱이 그린 아를의 여인을 보며 여러 가지 힌트를 얻은 고흐는 발작 속에서도 힘을 내어 마담 지누의 초상을 그린 뒤 고갱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자네가 그린 그림을 참고해서 그린 아를의 여인이 마침내 자네 마음에 들었다니, 정말로 기쁘다네. 이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일단 자네의 그림을 충실하게 따라가보기로 마음 먹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네가 그린 그림의 깔끔하고 간결한 스타일에 내 나름의 다채로운 색감을 불어넣어 자유로이 해석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네. 고갱 자네에게 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몇 달 동안 같이 작업하면서 아를 사람들의 특징을 제대로 관찰해내고 종합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거야."

 둘이 한날한시에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아를의 여인' 또는 '마담 지누의 초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갱과 고흐의 하모니가 어우러진 진정한 합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아를의 여인'은 자네와 나의 합작품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겠나. 내가 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한 달이나 끙끙 앓았지만, 자네와 나, 그리고 몇 사람만이 이 그림을 이해해주겠지. 가셰 박사는 '아를의 여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머뭇머뭇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단순해진다는 것은 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고." 가셰 박사는 고흐가 부딪힌 한계상황과 고흐가 뛰어넘은 한계를 명확히 간파해냈던 것이다. 고흐는 한없이 단순해져서 마침내 어떤 기교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였고, 그 결과 생 레미에서는 아를 시절의 고뇌를 뛰어넘는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까페`(1888)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까페`(1888)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카페'에 영감을 받아 그린 '아를의 여인'에서 나는 어떤 기품 있는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열정적으로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고흐, 특유의 거칠게 질주하는 몰입의 스타일이 잠시 숨을 쉬는 듯 가벼운 틈새가 느껴진다.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는 함박웃음이 아닌 아주 희미하게 머금고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 또한 감동적이다. 애정을 지닌 대상을 향한 냉정한 거리 두기. 그 어려운 과업을 고흐는 드디어 해낸 것이다. 고흐는 이 그림에서 지극히 단순해지고 있다. 전에 없던 절제와 여백이 생겼다. 나쁜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발견해내는 고흐의 강인한 성품이 이 상황에서도 빛을 발한다. 고갱과의 사이는 끝내 틀어졌고 발작도 심해졌지만, 남들이 보기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고흐는 고통 속에서도 영원을 향한 눈부신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1888)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1888)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출처: http://v.media.daum.net/v/20161018153405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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