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아하고 의아해, 견디다 못해 혹시 누구라도 이유를 알면 좀 알려달라고, 집단 지성에 기대는 것이기도 하다. 질문은 이거다.
'성폭행 피의자'의 장례식 기사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용은 이렇다. 최근 1967년생 장 모 씨가 자살했다. 2015년 11월에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수사받던 중이었다. 당시 피해자는 장 씨가 추행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찍었다. 서울해바라기센터서 성폭행 사실을 알렸고, 응급 키트 채취를 했다. 국립과학수사원 감정 결과, 피해자 특정 부위와 속옷 등에서 남성의 유전자형이 검출됐다.
피해자는 지난 1월 장 씨를 고소했다. 피의자인 장 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지난 1일 밤 11시40분, 서울 강동구 한 오피스텔에서 자살했다.
피해자 시선으로 짐작한다. 그 눈으로 이를 바라본다. 피해자 주장대로 장 씨에게 성폭행당했고, 9년이나 흘렀다면. 장장 3285일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떤 괴로움이 있었을 거며, 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너무나 어렵게 고소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이제야 죗값을 물으려 했는데 가해자가 돌연 자살했다면. 어떤 심경일까.
그러나 보도는 누구를 향했는가. 장 씨가 숨졌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어떤 정치인이었으며 누구 아들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과 함께. 발인식은 어디서 열렸고 아들인 연예인 누가 참석해 추모했으며 울었단 식의 보도가 여과 없이 표출됐다.
수습기자 교육 때 이리 말했었다. 기사를 쓰기 전에, 그걸 왜 쓰는지 생각해달라고. 그게 한 글자라도 기록됨으로 인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뭔가 바꿀 여지가 있는지, 감동이 있는지, 잘 살고 싶게 만드는지, 뭘 예방할 수 있는지, 좋은 정보를 주는지, 하다못해 재미라도 주는 건지.
여기에 하나라도 해당이 안 되면 기사 쓰는 걸 다시 숙고하자고.
성폭행 가해자건 뭐건 추모할 수 있다. 지인이나 가족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세상에 알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성폭행 가해자가 자살해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대한 기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함께 추모하자는 건가, 피해자가 보라는 건가, 국민이 알고 싶다고 했나, 심지어 관련 기사 댓글은 거의 다 이랬다.
'이게 뭐지. 무슨 성폭행 피의자 장례식 기사까지 쓰나. 마치 민주 열사 같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게 아니냐는 둥, 박 씨 지지자들에게 공격당하기도 했다. 5년이 흐른 뒤 박 씨와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에 있는, 피의자 장 씨에 대해 비판하는 이 글을 씀으로 그딴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됐다.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에서 생각할 뿐이다. 단 한 글자의 힘으로 뭔가 바뀌길 바라고, 반복해 좌절할 뿐이다.
실은 이 기사 제목에 대한 이유를 알기에 괴롭다. 써야만 하는 기사였을 거다. 이슈니까,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조회수가 나오니까, 조회수가 나와야 수익이 되니까,
그런 기사를 필자 역시 똥같이 많이 써왔음을 고백한다. 나만 깨끗한 척 쓴 글이 아니란 거다. 그보다는 자조(自嘲)에 가깝다. 내가 던진 물음이 내 발등과 몸통을 찍으며 한숨을 쉬는 거다.
그렇다면, 이 글은 또 왜 썼는가. '써야 하는 기사'라며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썼다. 같이 반성하자고 쓰는 거다. 비슷한 일이 또 생겼을 때,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작은 방지턱' 하나라도 생겼으면 해서 쓰는 거다. 함께 묻자는 거다. 이걸 씀으로 인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게 말이다.
그럼, 방향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장 씨는 유서로 추정되는 글에서 이리 남겼다고 했다. '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상처받았던 분들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상처받았던 '분들'이라.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 건가. 용서는 그리 모호하게 구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죽으면, 공소권 없음으로 자꾸 종결하면, 그런 식으로 가해자는 계속 피하게 되지 않을까. 가해자 없이도 수사는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피해자의 이후 삶은 어떻게 지킬 건가.
아마도 그렇게, 조금 더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남형도 머니투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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