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야 건륭제, 예술을 애호하는 황제지. 내가 금지하고 있는 한족 옷을 입고 시상을 떠올리니 정말 즐겁구나
청나라 때 한족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했는데 문자의 옥, 변발 강요, 만주족 복식 강요를 당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한족 옷을 입고 시를 짓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건륭제가 신하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이었고 피어있을 꽃이라곤 매화 정도만 존재할 겨울이었다

갑자기 건륭제는 영감을 받았다.
건륭제: (오오, 풍경이 근사하군. 이걸 소재로 한번 시를 써봐야겠구나!)
"한송이 한송이 또 한송이"
눈이 내린다는 걸 꽃에 비유한 말이었다.
주변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하들은
"대단한 문장입니다!!"
"역시 황상께선 비범하셔서 한마디를 하시면 천하가 깜짝 놀랄 수준입니다!"

아부를 듣고 으쓱해진 건륭제는 계속해서 시를 지어나갔다.
"삼편사편오륙편(三片四片五六片, 세송이 네송이 대여섯송이)"
"칠편팔편구십편(七片八片九十片, 일곱송이 여덟송이 아홉열송이)"

신하들은 당황했다.
"이게 시라고 할 수 있나..?"
일단 혀는 아부를 위해 현란히 움직였지만
점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었다.
설마 뒤이어지는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는 아니겠지?

건륭제도 작시를 멈췄다. 이젠 자신도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은 것이다.
건륭제: "하 이젠 시상이 더 생각 안 나는데 어떻게 마무리 짓지?"
한참 동안 정적 상태였던 건륭제 일행. 싸해진 분위기가 모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방금전까지 시가 천하를 어쩌구 하며 칭송했는데 시가 완성이 안되니
신하들 입장에선 황제가 노여워해서 피해 볼 상황이고
건륭제 입장에서도 쪽팔린데 도망갈 방법이 없는 배수진이었다.
단체로 어쩔 줄 모르던 그때, 한 명이 정적을 깨고 나와 무릎 꿇고 황제에게 말했다.

심덕잠: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狗尾續貂) 해주십시오!
쪽팔린 상황에서 도망갈 기회가 생긴 건륭제는 기뻐하며 허락했다.

그렇게 심덕잠은 마지막 구절을 지어 시를 완성했다.
"비입매화도불견(飛入梅花都不見, 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매화는 겨울에도 피어나는 상징적인 꽃이며 매화에 눈송이들이 날아 들어가 안 보인다는 낭만적인 내용으로 변모했다.
이 문장 하나로 앞선 무의미한 나열들이 마지막 한 문장을 위한 것이 된 것이다!

심덕잠은 겸손하게 담비 몸에 개꼬리를 붙였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면 지렁이 몸통에 용 꼬리를 붙인 격이다.
신하들은 그의 마무리에 기뻐했고 (살려줘서 고마워 ㅠㅠ)
건륭제도 기뻐하며 심덕잠에게 큰 상을 내렸다.
심덕잠은 건륭제가 시를 짓는 중 막혀서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와 시를 함께 완성하곤 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나중에 심덕잠이 자길 도운 사실을 책에 기록하자
표면적으론 다른 사유를 내세워서 그를 부관참시하고 가문은 멸문시켰다.
(건륭제: 쪽팔리게 그걸 왜 말하냐고!!)
아무튼 건륭제가 쓴 시는 정말 많았다. (덤으로 망쳐 놓은 그림들도 많았다)
그런데 황제인 그의 시를 감히 안 좋게 비평할 사람이 있었을까?
다 아부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칭찬을 들으며 만족하다가 노년 시기에는 자신의 예술 활동을 이렇게 자평했다.

“내 나이 이제 90세를 바라보게 되었구나. 지금까지 창작한 시들을 모두 모으면 당나라 시인들이 지은 시와 거의 같을 것이다. 이는 어찌 문예의 숲을 이루고 아름다운 시어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문학 실력을 이백이나 두보와 같은 거장들이 활약하던 당나라 시인들에 견주며 자화자찬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건륭제가 썼다고 전해지는 시는 총 4만 3천개에 달한다고함
하루에 하나씩 쓴다고 가정해도 117년임
실력이 없어서그렇지 진짜 좋아하긴 했던거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