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건축판에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적절한 표현이 아닌 건 알지만, 달리 뭐라 부를 방법이 없다. 심사 총량제를 어겼다고 사협회에서 공문을 보내면 노발대발하는 교수, 설계비 좀 크다고 억 단위의 로비금을 대놓고 요구하는 교수, 당선도 못시켰으면서 한 번 먹은 건 절대 안 내뱉는 교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로비하는 회사에서 로비질만 잔뜩 배워 독립하자마자 미친듯이 돈을 뿌려가며 판을 휩쓰는 젊은 건축사, 로비질이 탄로나지 않게 브로커를 내세워 판의 간을 보는 건축사, 로비가 탄로나자 이사를 앞에 세워 감방보내고 자신은 몸보신하는 대표.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C교수, P교수, J교수, S교수, K교수, L교수, 그리고 또 다른 C교수, P교수, J교수, K교수… 소문에 의하면 검찰이 들고 있는 건 많은데 그들 기준으로는 로비금이 소액인데다 한 번 까면 우리나라 건축과 교수들이 대부분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손을 못 댄다고 한다. 설계사무소도 마찬가지다. L사, E사, D사, H사, G사, C사, N사, 또 D사, H사… 회사 이미지 관리는 포기했는지 지금 로비판의 대표 선수들이 누구라는 건 별로 비밀도 아니다.
얼마 전 요즘 로비금이 설계비의 30%에 육박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여러 심사위원들에게 뿌리는 돈을 다 합친 금액일 터다. 아무리 로비판에서 논다고 하더라도 이 돈을 자발적으로 줄 리는 없고, 그만큼 요구하니 주는 걸 거다. 처음에는 다들 로비를 해야 당선이 되니 로비를 했을 거고, 다들 로비를 하는데 나만 당선이 되려면 시세보다 더 많이 줘야 당선이 되니 더 줬을 거고, 그러다 보니 돈 맛을 안 심사위원들이 더 많은 요구를 해서 이제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많은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거다. 한 마디로 괴물은 그들이 키운 셈이다.
그러다 보니 맨날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로비계의 대표급 사무소도 재무상황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과도한 로비금으로 심지어 마이너스가 나기도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고달픈 공공건축을 하다 보면 그 괜찮다는 공공 요율도 빠듯하기 십상인데 30%나 떼어주고 나면 대체 뭐가 남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실시설계는 외주로 싸게 후려치고 협력업체도 최저가로 쥐어짜듯 굴려야 겨우 직원들 월급이나 주는 정도 아닐까. 또 그렇게 그려낸 도면이니 디테일이고 나발이고 아구도 잘 안 맞을 게 뻔하다. 그러니 발주처가 달가와할 리 없고, 건축사에 대한 신뢰는 자동으로 바닥을 친다. 한 마디로 다 같이 망하는 길인 줄 알면서도 관성의 무서운 힘에 이끌려 고장난 차의 액셀 페달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꼴이다.
건축판이 이토록 힘이 드는 건 고금리에 민간 시장이 죽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일거리가 공급되는 공공건축판이 이 따위로 돌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저 어둠의 세력은 거대하다. 아주 거대하다. 그리고 그들은 길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나는 올 한해 무엇을 했나. 연초에는 건축사신문에 글을 썼고, 봄과 여름에 걸쳐 설계공모 좌담회에 몇 번 참석했으며, 그 사이 화성시에서 발주하는 몇 건의 공모전 운영과 관리에 시간을 썼다. 건축협의체 회의와 국토부 TF 회의에 새건협 대표로 나갔고, 얼마 전 사협회의 한 위원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또 그 와중에 SBS 그알 피디와 연락을 텄다. 하지만 내가 쓴 글과 한 말은 시간 너머로 잊혀질 것이고, 화성시 총괄팀은 내 임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물갈이가 될 것이다. 협의체도 서로간의 간극을 확인하는 일이 합의점을 찾는 일보다 잦을 것이고, 위원회는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국토부에서 시스템을 개선해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너무나 머나먼 길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비관론자다. 적어도 이런 식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지 않은 내 시간을 이런 일에 쓰는 이유는 내가 처음 공공건축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력을 피부로 알게 되었을 때 느낀 원망 때문이다. 그 원망은 어둠의 세력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판을 방치한 대다수의 선배들에 대한 원망이다. 적어도 나는, 원망의 화살이 날아올 때 후배들에게 할 말을 준비하고 싶다. 그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