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부청(巴寡婦淸): 파군지역의 과부 청

청은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단사(丹砂: 수은)무역을 하는 상인에게 시집갔지만 아쉽게도 부부가 함께 지낸 나날이 길지는 못했다. 청의 남편은 곧 죽고 만다.
청은 남편에게서 전체 가족기업을 넘겨받았고, 계속 키워간다. 사서에는 비록 청이 고심하여 경영한 과정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일개 여인이 자신의 힘으로 전체 가족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청의 가족은 현지에서 노비만 천명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무장한 인원만도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 수량은 거의 전체 현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그 산업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들 인원을 먹여살리는데만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보면 그녀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을지도 짐작이 간다.
청의 명성과 실력은 진시황의 관심을 끈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황제는 그녀를 손님으로 대우했고, 고향에 여회청대(女懷淸臺: 정조있는 여자 '청'을 품은 누대 라는 뜻)를 지어준다." 이는 진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대우이다. 심지어 후세라 하더라도 이같은 영광을 누린 여성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할 것이다.
중앙집권이 고도로 이루어진 진왕조에서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정권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진시황은 이런 개인무장의 존재를 인정했을 뿐아니라, 그의 가족의 우두머리인 파과부청을 표창하고 우대해주었다.
진나라때의 상인지위는 계속 낮은 편이었다. 심지어, "칠과적(七科謫)"에도 명확하게 상인을 열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파과부청이 이렇게 대우받은 원인은 더더욱 미스테리하다. 설마 단순히 사서에서 말한 것처럼 "정녀(貞女)로 보아 손님으로 대우했다."는 것일 뿐일까?
파군지역은 원래 진나라의 땅이 아니다. 기원전316년, 지나라가 이곳에 군을 설치한다. 파군의 지리위치는 수비하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렵다. 설사 진나라가 이곳에 군을 설치한 후에도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파촉지역은 물산이 풍부하고, 천혜의 험준함을 지니고 있어 아주 중요한 전략요충지이다. 또한 진나라와 초나라를 잇는 교통요지이다. 파촉지구는 진나라에 있어서, 초나라와 통하는 교통요지일 뿐아니라, 초나라를 공격하는 후방기지이기도 하다. 전략물자공급의 중요한 지역이다. 진나라는 육국을 병합하기 위하여 부득이 파(巴) 지역의 인심을 회유한다. 파 지역에 우대정책을 쓴다. 그리고 파과부청의 가족기업은 그 지역에서 명망이 비교적 높았다. 자연히 회유대상이 된다. 청에 대한 표창은 실질적으로 파지역에 대한 우대이다.
파지역은 지리위치가 중요할 뿐아니라, 광산자원도 아주 풍부했다. 그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단사(수은)이다. 진시황은 말년에 신선이 되기를 꿈꿨고, 지궁도 수은으로 만든다. 단사에 대한 수요와 의존은 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단사의 광범위한 효능으로 단사는 중요한 물품이 된다. 파과부청의 가족이 경영하는 것은 바로 단사산업이다. 심지어 진나라제국내에서 단사자원을 가장 많이 장악한 인물이기도 하다. 진시황은 과부청의 가족이 개인무장을 보유한 것을 묵인한 것도 일정한 정도에서 제국의 단사산업에 대한 보호를 묵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에 대한 예우는 마찬가지로 단사산업에 대한 지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어머니 조희(조태후)에 대한 컴플렉스(때문인지 진시황은 황후가 없었음)로
정절을 지키며 산 청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설도 있음. 청은 죽을 때도 함양궁에서 죽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