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 「울타리 밖」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중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이육사, 「황혼」 중
육 첩 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여진 시」 중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조지훈, 「낙화」 중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김현승, 「플라타너스」 중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박두진, 「도봉」 중
언젠가, 아 언젠가는
이 칙칙한 어둠을 찢으며
눈물 속에 꽃처럼 피어날
저 남산 꽃 같은 사람
-김용택, 「그리운 그 사람」 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 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신동엽, 「향아」 중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정희성, 「얼은 강을 건너며」 중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중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중략)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장석남, 「배를 매며」 중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 년 되었다
-문정희, 「이별 이후」 중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정현승, 「강변역에서」 중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할 날들을 생각했다
-정현승, 「강변역에서」 중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김수영, 「파밭 가에서」 중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
-김혜순, 「별을 굽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