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 소개에는 아래처럼 되어 있는데
잔잔물이라고 하기에는 책 덮고 울렁거리는 게 많아 문체가 엄청 담담하지만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 너무 파도 같아 병에 담긴 소용돌이 같은 느낌이야!
약간 호수돌스러운 고풍스러운 문체와 정말 귀족적이고 마키아밸리스러운 제왕학을 배운 왕녀가 나와서
취향 안 맞는 덬은 정말 안 맞겠지만 궁중암투에 서양 왕정이 배경인 시대물 좋아하고,
그런 느낌의 계략을 꾸미거나 약간 셰익스피어 비극 느낌이 나게 주인공이 파국으로 마구 치닫는 느낌을 좋아하면 진짜로 취향임ㅠㅠ
작가님이 영문학 전공을 하셨나 느꼈던 게 글에서 인용되는 시나 노래가 저런 느낌이 많아서 그래 보여!
내용은 궁중에서 천한 노리개, 모두의 어릿광대인 남자 주인공과 그런 어릿광대를 의외로 자기 옆에 두고 총애를 하는 걸까 아니면 관심을 주는 걸까 모호하게 그려지는 왕녀(주인공)가 나와 하지만 그 왕녀는 좋아하더라도 좋아하는 걸 표현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도 싫어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궁정의 귀족다운 가면을 항상 쓰고 사는 캐릭터야
이거 작품 감상 중에 만화 유리가면의 두 사람의 왕녀를 좋아하면 좋아할 소설이라고도 적혀 있었는데 딱 그 느낌임!
정치꾼들로 드글거리는 궁에서 자라서 정적을 쳐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숙명이며,
자기 권리가 흔들리는 걸 모욕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뼛속까지 후대로 길러진 첫째 왕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아.
그런 언니와는 다르게 궁 밖에서 자라서 궁의 귀족적인 탈을 쓰고 자행되는 멸시와 다른 사람의 피를 보려는 음험한 계략 자체를 모르는 둘째 왕녀...
열살이라서 천진난만하기도 하지만 궁 밖에서 살아서 평민과 빈민이 어떻게 사는 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편이기도 해.
그리고 그 어릿광대는 첫째 왕녀를 충심과 사랑을 다해 섬기지만 자기가 언젠가 받았던 친절처럼 둘째 왕녀에게도 친절을 보이고 그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노력함.
(둘째 왕녀가 빵을 훔쳐 빈민에게 주려고 하자 같이 열심히 도와주려고 하거나, 첫째 왕녀가 둘째 왕녀가 입궁했을 때 아무도 저 둘째에게 말을 걸지도 말고 돕지도 말고 없는 척 하라고 명령 내렸던 걸 나는 궁정의 바보인 어릿광대라고 그러면서 명을 거부하고 둘째 왕녀와 놀아주고 얘기도 많이 해주고 그럼)
하지만 왕좌는 하나밖에 없고, 첫째 왕녀가 둘째 왕녀를 완전히 꺾어 후환을 없애려고 애쓰는 일은 둘째 왕녀로 하여금 자기가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언니인 첫째를 꺾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일이기도 함.
두 왕녀의 치열한 다툼에 낀 어릿광대가 왜 이야기의 화자이며, 주인공인지는 후반에 가면서 더 밝혀지는 일인데(출생의 비밀은 없어! 시대가 시대라서 신분의 한계가 정해져 있어)
오히려 어릿광대가 주인공이고, 첫째 왕녀도 어릿광대에게 다 표현은 하지 못했지 진심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지막까지 서글프고 여운이 남는 소설임.
피폐물은 싫지만, 인물 사이의 감정이 잘 살아 있고+등장인물의 잘 짜인 서사+그들이 과거에 했던 판단이 현재의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동시에 얽어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추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