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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붕어빵 사장님과 썸타는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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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6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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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는 붕어빵이라 썼지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길쭉한 물고기 모양은 잉어빵, 허리가 잘록하고 잉어빵보다 크기가 작으며 흔하지 않은 건 붕어빵!! 실제로 잉/붕어빵 가게의 현수막 글자를 잘 읽어보면 잉어빵인지 붕어빵인지 알 수 있음. 여튼 내가 먹은 건 잉어빵이므로 아래부턴 잉어빵으로 기술할게





그분과 나의 첫만남은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평소 나는 붕어빵, 잉어빵 심지어는 토끼빵까지 다 좋아하는 애호가였고,
12월의 초입에 들어섬에 따라 자연스레 잉어빵을 먹을 기대를 가슴팍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유난히 직장 스트레스가 심했던 어느 날의 퇴근길에, 그날따라 더욱 격렬히 잉어빵이 먹고 싶어진 나는
직장 앞 잉어빵 가게에 줄을 섰다.

하지만 내 욕망이 무색하게도 잉어빵 가게 할머니와 말다툼까지 하던 내 앞 사람은 잉어빵 두마리만을 남기고서 모두 사가버렸고,
잉어빵은 1000원에 3마리였기에 나는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려는 그때, 또 다른 잉어빵 가게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이 사장님과 나의 첫만남이었지만 그때 내 기분은 영 바닥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혼자 잉어빵 6마리는 무리겠지, 하며 슈크림 3마리만을 안아들고 바로 지하철 역사로 내려와 버렸기에, 사장님의 첫인상은 그저 희미한 형체만 남은 잉어빵 가게 주인일 뿐.
아무 감정없이, 이 집도 그냥 내가 아는 잉어빵 맛이겠지, 하며 베어 문 잉어빵...


그것은 천국의 음식이었다.


지난 2n년간 매 겨울마다 빼놓지 않고 수없이 많은 잉어빵을 먹어치워왔던 나였고, 맛이 있던 맛이 없던, 그저 잉어빵, 붕어빵, 혹은 토끼빵이어도 그 구조와 맛이 비슷하면 모두 좋아했었다. 나는 정말로, 느끼한 잉어빵을 먹고 소화가 안 되어서 까스활명수를 사먹는 한이 있어도 그 다음날이면 잉어빵 가게 앞에 서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잉어빵은, 내가 쌓아왔던 여지껏의 모든 잉어빵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바삭해서 황금빛과 밝은 브라운의 중간빛을 띄는 겉, 그리고 그 얇은 반죽 사이로 선명하게 비치는 속의 슈크림. 이렇듯 얇은 반죽에도 잉어빵은 내가 집어먹을 때마다 흐물하게 쓰러지지 않았다. 바삭하고 단단하게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것은 내가 한 입을 베어먹든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에서 꼬리까지 다다를때까지 지속되었다. 게다가 적당한 온기. 호호 불까말까 고민되는, 너무 뜨겁지 않아 바로 먹을 수 있지만 식지는 않은, '갓 구운'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온도. 김이 나고 있음에도, 봉지에 구멍을 뚫지 않았음에도, 세 마리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눅눅해지지 않던 그 건조한 바삭함.


단언컨대 그 순간 내 기분은 12월 중에서 가장 좋았다.


그 다음부터 그곳으로 출근을 하는 매주 월, 목요일마다 꼬박꼬박 팥 세마리, 슈크림 세마리를 정확히 지하철을 기다리는 6분간 1분에 한마리씩 모두 먹어치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잉어빵이 너무 완벽했던 탓인지, 평소 2~3마리면 느끼해지던 속이 6마리를 먹어도 전혀 느끼해지지 않았다.

지난 약 3개월동안 나는 그분의 잉어빵을 먹으며 오만 생각을 다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만수르였다면 이 분을 모셔가서 억대 연봉을 주고 가끔 내가 먹을 잉어빵만 굽게 해드릴텐데, 혹은 대한민국 잉어빵 기능장으로 이분을 임명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 그리고 다가올 봄에 대한 두려움까지. 1월 2일, 새해를 맞이하고 다음날에 왜인지 사장님이 가게를 열지 않으신 걸 볼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가장 컸던 변화는, 출근이 너무 기다려진다는 것이었다. 세상 누구가 과연 출근을 기다릴 수 있을까. 나도 그런 건 평생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길에 미리 사장님이 나와계신지 슬쩍 보는 건 너무 즐겁고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혼자 오만 감정 기복을 다 거치고, 나는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해외 일정으로 2주간 한국을 떠나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유럽을 모두 다 돌고오는 일정이었기에 기대됐을만도 한데, 나는 사장님의 잉어빵을 2주간 못 먹는단 사실이 너무 가슴에 사무쳤다. 잉어빵이 계절 먹거리었기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장님이 계실지 안 계실지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했기에 더욱 쓰라렸다.

결국 나는 출국 전 마지막 퇴근길에, 여느때처럼 팥 천원 슈크림 천원을 주문해 안아들고는, 그 근처를 서성이다 슈퍼 온장고의 베지밀을 사다 다시 사장님께로 돌아왔다.

그때 사장님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히 생각이 난다. '왜 또 왔지'하는 놀라움 반 두려움 반의 얼굴. 나는 멋쩍게 웃으며,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을 하듯 말이 잘 안 나왔다. 에,, 제가 먹어 본 붕어빵 중에 가장 맛있습니다,, 근데 2주간 해외에 가서 못 옵니다,, 너무 맛있게 잘 구워주셔서 감사해서 뭐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 집 가는 길에 다시 돌이켜 본 나의 말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은 처음으로 손님일 뿐인 나에게 웃어주셨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어머니 뻘의 사장님께 왜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렸는지.. 그리고선 나에게 잉어빵을 더 주시려다, 내가 이미 많다고 하니, 레드향까지 쥐어주셨다. 집에 가는 내내 달콤한 레드향 향기가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웃음이 안 멈췄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2주간의 해외 일정에서 돌아온 내가 다시 사장님께로 간 첫 날이다. 사실 지난 월요일에도 출근을 했지만, 일요일에 귀국해 시차적응 때문에 잠을 자다 화장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은 채로 출근했고 그 모습으로 사장님을 뵙긴 싫었기에 이를 악물고 그날은 그냥 퇴근만 했다.

사장님은 날 보자마자 환히 웃으시며 "오랜만이네요."했다.


내 달콤한 겨울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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