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이상해
정작 영화관에서 볼 때는 담백하게 보고 나와서 밥 먹고 잠도 잘만 잤는데
오늘 아침 세수하면서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어
집안 여자들이 방안에 둘러앉아 실을 둘둘 감는 장면이었어
그러다 출근길에는 콴메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퇴근길엔 아쉐의 원피스 무늬가 뜬금없이 생각나더라
이후로는 영화 내내 덤덤하게 이어지던 두 여성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아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하지
대놓고 대만 본성인 4형제의 이야기인데 생각나는 건 여자와 여아의 목소리야
그러고 보니 지배 권력의 교체 시대, 2.28과 백색테러를 다루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커녕 국민당 관리 얼굴 하나 제대로 안 나오고 구체적으로 어떤 군사적 지시가 있었는지도 영화 속에서는 묘사되지 않아
둘째가 어떻게 일제에 징집되어 죽었는지 셋째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도 영화엔 나오지 않아
남은 건 콴메이와 아쉐의 일기, 편지, 구술로 재구성되고 순서도 뒤죽박죽 섞인 가족사의 파편일 뿐
왜일까 저녁 먹으며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
그 결과, 영화 스토리 상 표면적인 이야기를 주도하는 건 4형제이고 공식 역사에 남겨지는 건 권력의 기록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진실은 두 여성의 기억에 오롯이 기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하자면 '사적 폭력 체계인 가부장제에서 배제된 여성과 여아가 역설적으로 기억의 대를 잇고 진짜 역사를 후대에 전수하는 구조'랄까
그렇다면 화려한 조명이나 연출, 카메라 워킹 없이 투박하고 무심한 연출도 의도된 바겠구나
폭력의 시대를 화려한 시각적 전시로 소비할 수는 없다는 도덕적 표현이자
역사를 증언하는 관찰자로서의 최선의 시선 처리이겠구나
여기까지 이르자 메시지와 서사 구조, 기술적인 부분까지 고도로 잘 짜여진 영화라는 걸 알게 됨
아 정말 좋은 영화야
보고 갓 나왔을 때보다 하루 이틀 묵혔을 때 생각이 점점 더 익어가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아
그래 이게 명작이고 영화 보는 맛이지
판권 잘 해결돼서 영화관에서 또 보고싶어
잡담 비정성시) 당일보다 다음날 더 생각나는 영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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