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은 화장실에 큰일 보러 갔다 하면 기본 30분이에요. 다른 집 남편들도 그런가요?” “남편 분 ‘화캉스’ 가셨네요. 내버려두는 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을 겁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 사이에선 ‘화캉스’가 뜨거운 논쟁거리다. 호캉스(호텔+바캉스)는 들어봤는데 화캉스는 뭘까. 화장실에 간 남편이 짧게는 30분, 길면 1시간씩 ‘화장실에서 바캉스를 즐긴다’는 뜻이다. 원래는 회사 근무 중에 몰래 화장실에 가서 쪽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보며 쉬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였는데, 젊은 남편 중에는 집에서도 화캉스를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화장실이 제일 편하다는 남편들
아내들은 화캉스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자들은 화장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대체 뭘 하는 걸까. 잔소리가 무서운 남편들은 “원래 남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아내들의 수사(?)에 따르면 “화장실 문에 귀를 대보니 유튜브 보고 있더라”라거나 “휴대폰 게임 소리가 들린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변기에 앉아 한참 뉴스를 보고 나와 곧장 아내에게 뉴스 얘기를 꺼내 “애 우는데 뉴스나 보고 앉아 있었냐”며 혼나는 남자들도 있다.
아내들은 “그렇게 변기에 오래 앉으면 치질 생기는 거 아닌가” 걱정도 한다. “나는 변기에 3분만 앉아 있어도 다리에 피가 안 통해 저리던데, 재주도 좋다”는 반응이다. 남편들은 “볼일 다 보고 변기 뚜껑을 내린 뒤에 좀 더 앉아 있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초등학생 아들 하나를 둔 직장인 이모(41)씨는 “거실에 있으면 애는 자꾸 놀아달라 조르고, 아내는 세탁기 돌려라 청소기 돌려라 정신이 없다”며 “그나마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육아에 가사에 정신없는 아내들은 화캉스하는 남편을 보며 야속하고 화나는 마음이 들지만, 화캉스를 귀엽게 봐주는 경우도 있다. “한참 화장실에서 유튜브 보고 나오면 갑자기 나한테 잘해준다”거나 “뭔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냥 둔다” “한참 숨어 있다 나오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는 것이다. 거꾸로 아내가 화캉스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남편이 맨날 화장실 앞에서 애한테 ‘엄마 이제 그만 나오라 그래’라고 해요....”
화캉스도 눈치가 보여 아예 집 밖으로 나가는 남자들도 꽤 있단다. “와이프가 화장실에도 못 있게 해서 요즘은 지하주차장 내려가 차에 앉아 있네요.” “분리 배출하러 간다 하고 재활용 쓰레기 좀 들고 나와서 버리고, 차에 가서 유튜브 좀 보거나 휴대폰 보면서 숨 좀 돌리고 다시 들어가요.”
◇화캉스는 수퍼 대디의 귀여운 일탈?
대체 남편들은 왜 화장실과 사랑에 빠졌을까. 그들은 “때때로 혼자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공간이 화장실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화캉스를 즐기는 남편들은 대체로 맞벌이 부부로 경제활동과 육아, 가사를 아내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임상심리 전문가 A씨는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남자들이 사회생활해서 돈을 벌어다 주는 경제적 역할만 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부부가 경제활동과 가사·육아를 분담하다 보니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가부장 시대 아버지를 보고 자란 지금의 젊은 아빠들 입장에선 과거와 달리 경제활동에 가사와 육아까지 담당해야 하니 더 힘들고 벅차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화캉스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 맞추지 못하는 남성들의 잔꾀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서울 성별 영향 평가 센터가 10세 이하 아동이 있는 청년 맞벌이 양육자와 관련된 통계를 분석해 보니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 분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여성(84.1%)과 남성(79.8%)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녀가 하루에 일, 가사, 육아에 참여하는 시간을 비교해 보니 여성은 평균 일에 272분, 가사에 114분, 육아에 126분을 쓴 반면 남성은 일에 342분, 가사에 49분, 육아에 80분을 썼다. 남성이 일은 70분을 더 했지만 가사와 육아에는 여성보다 111분이나 적게 참여하는 것. 남편들이 머리로는 ‘육아·가사를 공평하게 해야 한다’지만, 실제로는 몸이 따르지 않아 화장실로 도피한다는 해석이다.
◇국평 아파트엔 남편의 공간이 없다
‘화캉스’를 보는 다른 전문가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20~30평대 아파트에 있는 2~3개 방은 안방과 옷방, 아이 방으로 나누고 나면 남자들이 있을 공간이 없다”며 “특히 우리나라 아파트는 개인, 가정에 맞게 공간 수정이 불가능한 벽식 구조라 현재로선 남자들에게 화장실만이 유일하게 그 누구도 못 건드리는 공간, 문을 잠글 수 있게 허락된 공간”이라고 했다. 외국은 주택에 살면 보통 차고나 지하실이 남자들의 공간이 되는데, 한국은 아파트에 많이 살다 보니 자신의 공간을 갖기 어렵다.
이런 공간 부족이 저출산과 딩크족(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현준 교수는 “딩크는 사교육비를 비롯한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지만, 개인과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젊은 남성들은 아이를 가진 뒤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박탈당하고 가정 내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려나버리는 데 거부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자신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자녀를 낳고 기르려면 더 큰 집으로 이사하거나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외에는 마땅한 답이 없다는 것이다.
자꾸 화장실로 들어가는 저 남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임상심리 상담 센터장인 B씨는 “닦달하지 않는 게 낫다”고 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쉬는 것마저 눈치가 보이면 남편에게 집은 휴식하는 공간으로서 기능을 잃게 돼 더 큰 무력감과 우울감을 줄 것”이라고 했다. “화캉스를 모른 척하는 게 가정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가 허튼소리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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