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나는 사람을 쉽게 단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세상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을 나누곤 했다. 그러나 첫인상이 뒤집힌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나니, 이제는 단정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겉으로 명쾌한 사람이 실은 누구보다 오래 사유한 사람일 수 있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결론만 보고 내면을 추측할 뿐이다. 여전히 “당연”, “원래”, “상식”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 말들이 대화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정과 별개로, 그 사람들의 내면 또한 나만큼 복잡할 수 있음을 인정하려 한다.
감정은 즉각적이지만 판단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는 호오보다 시비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피곤하다. 타인을 의심하는 만큼 나 자신의 판단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피로 덕분에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최근 본 『퀸즈 갬빗』은 그런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체스를 다루지만, 실은 인간의 품위를 이야기한다. 알마 위틀리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한때 별을 꿈꾸었던 사람.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만큼은 체념도, 술도, 공허함도 잠시 사라진다. 그녀가 베스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단순히 천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때 자신 안에도 존재했던 가능성의 빛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몫을 요구한다. 그 장면은 탐욕이 아니라 존엄이다. 베스가 오히려 더 큰 몫을 제안하는 순간, 두 사람은 이해관계를 넘어 서로의 품위를 인정하는 관계가 된다.
작품 속 남성들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베스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을 구걸하지도, 취약함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체스를 위해 경쟁하고, 때로는 욕망보다 더 큰 가치를 선택한다. 현실이라기보다 이상에 가깝지만, 그 이상은 공허하지 않다. 인간은 때로 욕망보다 품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품 전체를 지탱한다.
『위플래시』의 플레처도 떠오른다. 분명 잔인한 인물이다. 그러나 재즈바에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겸손하고 아름답다. 사람은 언어로 자신을 꾸밀 수 있지만, 예술 앞에서는 의도치 않은 내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음악을 경외하는 존재였다.
김기덕 감독이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도 뛰어나며 머리도 비상했지만,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오래 기억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알마도, 이름 없이 사라진 누군가도, 현실의 수많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신이 별이 될 것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을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 별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어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어떤 이는 조용히 살아가고, 어떤 이는 플레처처럼 블랙홀이 되어 타인의 빛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한 가지를 믿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성공보다, 끝까지 사랑한 것을 통해 기억된다. 알마는 피아노를 사랑했다. 플레처는 재즈를 사랑했다. 베스와 보르고프는 체스를 사랑했다. 그 사랑 앞에서만큼은 모두가 잠시 자신의 가장 진실한 모습을 드러냈다. 적어도 모두는 한때 자신이 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행동은 비판할 수 있어도, 한때 별을 꿈꾸었던 마음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 끝없는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