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 20.5센티미터. 무게 270그램. 최고 속도 시속 120킬로미터. 상대 코트 도달 시간 평균 0.5초. 이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그 무게와 속도는 우주와 같다. 승리는 그 우주 너머에, 그 무게와 속도를 이겨낼 때 얻어진다.” 평균 승률 10% 미만의 배구선수 출신 감독 우진(송강호)은 에이스 선수의 이적으로 해체 직전까지 몰린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직을 제안받는다. 신연식 감독은 영화 <1승>의 개봉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블랙퀸즈전을 하루 앞두고 1승을 해야만 하는 김우진 감독의 마음과 같다”는 심정을 전해줬다.
-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스포츠영화의 문법을 복기하기도 했나.
= 그런 건 없었다. 매일 무수히 많은 경기가 열리고 누군가는 이기고 진다. 찰나의 순간, 지나가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우주와 같은 순간이다. ‘1승’을 하기까지 구체적인 삶의 디테일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히려 기존 스포츠영화에서 자주 다룬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보통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스포츠영화도 토너먼트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1승>은 승리가 단 한번뿐이다.
= 스포츠영화 플롯은 토너먼트 구성인 경우가 가장 많다. 이른바 ‘도장깨기’ 구조. 결승전까지 올라가면 북한이나 일본을 만나거나, 상대팀에 가족이나 원수가 있다. (웃음)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 영화 <록키>는 이벤트 경기를 다루기 때문에 주인공 록키의 개인 서사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페넌트레이스이면서 <록키>처럼 클라이맥스를 이벤트 경기화할 수 있는 설정을 찾다가 재벌 2세 강정원(박정민) 구단주의 상금 공약이 떠올랐다. 만약 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1승> 작품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김연경 선수의 영향으로 최근 여자배구 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야구나 축구만큼 인기 종목은 아니다. 여자배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영화적으로 적용했을 때 가장 넓고 높고 빠르게 표현할 수 있는 실내스포츠다. 배드민턴이나 탁구는 배구보다 빠르지만 너무 작다. 농구는 공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다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네트를 사이에 둔 배구보다 공간을 넓게 쓸 수 없다.
- 실제 배구선수들을 레퍼런스로 삼기도 했나.
= 멕시코의 사만타 브리시오 선수가 서브를 넣을 때 공 돌리는 동작을 안소연 선수(송이재)에게 계속 연습시켰다. 오보라 선수(장수임)는 외국인 용병들의 동작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강지숙(신윤주)은 MSG를 조금 쳐서(웃음) 마이클 조던처럼 더블 크러치를 할 수 있는 선수로 묘사했다. 체공력과 유연성을 두루 갖춘 선수들을 참고했다.
- 실제 배구선수들과 배구 트레이닝을 받은 배우들이 함께 경기 장면을 찍었다. 이들이 서로 잘 어우러질 수 있게 연출하는 건이 관건이었을 텐데.
= 배우가 배구를 배우는 것과 배구선수가 배구선수 연기를 하는 것 중에서는 후자가 훨씬 쉽다. 실제 선수들이 코트에서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내면연기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경기 장면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프로선수들을 출연시켰다. 블랙퀸즈의 성유라 역을 연기한 한유미는 해외 진출 1호였던 레전드 선수다. 배우들은 CG의 힘을 많이 빌렸다. 발판을 딛고 점프를 한 뒤 CG로 발판을 지웠다. 공도 나중에 CG로 입힌 거다. 배우들이 공 없이 하는 배구 훈련을 계속 받아서 그런지 현장에서 시선과 타이밍을 맞추는 건 더 잘했다. (웃음)
- 핑크스톰 선수들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 키 175cm가 넘는 여성들이 한국에 그리 많지 않아서 힘들었다. 게다가 연기 경험이 있는 키 175cm 이상? 더더욱 없다. 배구선수 평균 키에 상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모델쪽이다. 그래서 방수지 역의 장윤주씨, 오보라 역의 장수임씨처럼 모델 출신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예전에 모델 분들과 패션 브랜드 단편영화 시리즈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 모델들은 연기 경험이 없어도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더라. 리베로는 키가 크게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운동신경이 좋고 연기 경험이 풍부한 이민지씨를 캐스팅했다.
- 마지막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김연경 선수의 카메오가 화제가 됐다.
= <1승>이 배구영화라고 도장을 찍어줄 수 있는 아이콘 같은 존재다. 시즌 중 시간을 내 우정 출연을 해준지라 너무 고맙고 죄송해서 많은 연기를 시키진 않았는데 오히려 본인이 아쉬워했다. 대사도 많이 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면서. (웃음)
- 핑크스톰을 둘러싼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이들의 ‘1승’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장단점은 그가 지닌 특질이다. 단점을 지우면 장점도 사라진다. 핑크스톰 구단의 구성원들은 다른 곳에 가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는데 이 안에서는 누구도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강정원 구단주만 해도 재벌 2세 세계에서는 주류가 아니다. 다른 시나리오 버전에서는 친형이 하버드대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빠에게 맞는 것을 보고 의도적으로 이상한 짓을 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는 서사도 있었다. 김우진은 선수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감독이다. 핑크스톰에서는 누군가의 단점을 다른 누군가가 백업해주고 있다.
- 송강호와 박정민 두 배우가 <1승>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 <동주> 촬영 때 이준익 감독이 매우 행복해했다. 젊은 배우들과 함께하는 게 너무 좋다고, 앞으로도 젊은 배우들과 함께할 거라고. (웃음) 그래서 <1승>의 김우진 감독도 원래 젊은 나이로 설정돼 있었다. 투자가 어렵진 않았는데 캐스팅이 난항이었다. 주인공은 감독인데 직접적인 퍼포먼스는 선수들이 하다 보니 장벽이 있었다. 송강호 선배님에게 사석에서 <1승> 캐스팅의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선배님이 “그런 작품은 나처럼 연배 있고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해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배우가 해야 밸런스가 맞는다”고 하는 거다. 찰나의 순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정민씨는 훨씬 이전에 캐스팅이 됐었다. 이 배우는 왕도 양반도 왕자도 연기할 수 있지만 재벌 2세 캐릭터를 시킬 사람은 나 말고 없을 것 같았다. (웃음) <동주>를 함께하면서 쌓은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데이터가 있었기에 그가 연기하면 굉장히 독특한 재벌 2세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1승> 속 이 장면
“<1승>에 나오는 랠리 신은 배구 장면을 영화로 구현했을 때 반드시 표현하고 싶었던 시퀀스였다. 남자배구에서는 이 정도 길이의 랠리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데 여자배구에서는 꽤 자주 나타나는 그림이다. 수비가 강하고 끈끈한 조직력을 보여주면서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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