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성인용품 방문판매에 나선 여성 4인의 이야기를 그린 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 마지막 회 정숙(김소연)은 성인용품 판매점 '정숙한 세일즈' 오픈식에 몰려든 반대 시위대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로막으면 날아올라서라도 넘어가면 되죠.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정숙한 세일즈>는 가부장 문화 속에서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드라마 초반엔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대사가 참 반가웠다. 정숙을 비롯한 드라마의 주인공 '방판 시스터즈' 4인방이 여성을 억압하는 시선으로부터 '날아오르기로' 결론지어졌으니 말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적응해서 살던 '방판 시스터즈' 4인방 정숙, 영복(김선영), 금희(김성령), 주리(이세희)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기까지 그 심리적 여정을 짚어본다.
대상화의 늪
한적한 시골 마을. 금희(김성령)네 가정부로 일하며 아들 민호(최자운)를 키우던 정숙은 남편 성수(최재림)가 실직을 하자 성인용품 방문 판매 사업에 뛰어든다. 사업 설명회에서 정숙은 아이 넷과 단칸방에서 사는 영복을 만난다. 둘은 민망해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한다. 한편, 영어 교사였으나 결혼 후 남편 내조만 하는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던 금희는 첫 방판 장소로 자신의 집을 빌려주고, 그날 오랜만에 생기를 느낀다. 그렇게 금희도 사업에 합류하게 되고 간간이 이들의 일을 돕던 미혼모 주리도 미용실과 방문 판매를 겸하기로 한다.
이렇게 모인 넷은 제품의 이름조차 말하기 어려워하면서도 일에 진심을 쏟는다. 하지만, 드라마 초반 이들이 제품 판매를 위해 내뱉는 말들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적인 자리에 두고 있었다. 영복은 섹시하게 보이는 슬립을 팔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내 마누라만 빼면 다 이뻐 보인다잖아요. 살 맞대고 살다 보니까 내 마누라는 점점 여자가 아닌 게 된당께요. 그러다 까딱하면 바람피우고 그러는 거죠." (2회)
이는 여성을 주체적인 성적 욕망을 가진 존재가 아닌, 남성의 성적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말이었다. 4회 동네 지주인 엄 회장이 바람피우는 것을 목격했을 때도 이렇게 말한다.
"사모님은 그 슬립을 안 입으셨나?" (5회)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던 방판 초기, 이웃들 또한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방문판매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정숙의 집엔 'sex'라는 낙서가 새겨지는데, 동네 주민들은 이렇게 쑥덕거린다.
"그 어떤 놈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민호 엄마 아니겄어? (...) 세상에 그런 민망한 물건이나 팔고 다니니까 이런 사달이 나지." (4회)
이처럼 드라마 초반엔 '시스터즈'도 이들을 바라보는 주민들도 모두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대상화의 늪에 빠져 있었다.
분노를 인식하고 표현하다
이들이 대상화의 늪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지점은 정숙이 외도한 남편에 대한 분노를 인식하면서부터다. 성수는 정숙의 친구 미화(홍지희)와 성관계를 맺고, 정숙은 이를 목격한다. 이후 잠시 집을 떠나있던 성수는 아들 민호가 보고 싶다며 집으로 돌아와 적반하장으로 정숙에게 화를 낸다. "사내자식이 바람 한번 피웠다고 쫓겨나면 제 집구석에서 살 놈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5회).
이전까지 이혼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별거만 한 친정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민호에게 아빠의 자리가 필요하진 않을까 고민하던 정숙은 성수의 이 말에 크게 분노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성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불행하면 민호가 불행할 텐데, 그렇게 만들 순 없어." (5회)
이 말은 정숙이 자기 자신을 행복의 주체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대사였다. 이후 정숙은 힘든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보다 더 잘 돌보고, 민호의 엄마이자 가장으로서의 일상에도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중 정숙은 홀로 외딴곳에 방판하러 갔다가 동창 경식에게 성폭력을 당할 뻔 한다. 도현(연우진)의 도움으로 무사하긴 했지만, 정숙은 이 사건이 이웃에 알려질까 전전긍긍한다. '그런 물건 팔고 다니고 이혼까지 했으니 그럴 만하다'는 비난에 시달릴까 봐 괴로워한다. 이는 정숙이 여전히 가부장 사회의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방판 시스터즈'는 정숙을 찾아와 "잘못한 거 없는 사람이 왜 피해 다니냐"며 함께 분노하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이에 힘입어 경찰서에 갔던 날 정숙은 다시 한번 분노를 표현한다. 가해자 경식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치면서 말이다. 이 분노는 정숙이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하는 감정 중 하나인 자책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기로 결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방판 초반 자신을 몰아붙였던 이웃 여성들 역시 정숙의 편에서 증언한다. 이들은 여성을 위한 성인용품 판매에 대한 편견도 거둬들인다.
평등한 관계, 공감과 연대
여성이 불평등을 인식한 후 경험하는 분노는 대상화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하지만 여성의 분노는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아무 잘못도 없는 정숙의 어머니 복순(강애심)이 이혼녀에 대한 인식이 두려워 이혼하지 못하고, 미혼모 주리가 자리 잡기 어려웠듯이, 가부장 사회는 많은 것을 여성의 잘못으로 돌린다. 그래서 여성들은 분노가 일 때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정숙처럼 분노를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숙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방판 시스터즈들의 공감과 연대의 힘이 컸을 것이다. 정숙이 이혼한 직후, 넷은 섬으로 출장을 가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6회).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나누는 이런 대화는 여성들 역시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한다. 11회 자신에게 결혼 전 아들이 있었음을 밝힌 금희는 "나를 안 좋게 볼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방판 시스터즈들은 "아시다시피 저는 미혼모"(주리)고, "전과 있는 남편도 있고"(영복) "저는 남편이 바람피워서 이혼했다"(정숙)며 자신의 치부를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큰 아픔을 하나씩 공유했으니까 앞으로 더 친해지는 거야"라며 의기투합한다. 나는 이것이 여성들의 관계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잘난 점을 과시하기보다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서 보다 친밀해지는 이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수용하게 되고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나아가 이들의 관계는 점차 평등해진다. 한때 '사모님'이었던 정숙과 금희의 관계는 동업자로 변하고, 정숙은 금희와 나란히 누워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될 줄 몰랐다"고 말한다(11회). 여전히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쓰긴 하지만, 미혼모도, 전과자의 아내도, 이혼녀도, 그리고 부잣집 사모님도 모두 평등하게 일하며 서로를 돕는다. '평등'의 경험은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방판 시스터즈'들은 공감과 평등에 기반한 연대로 부당함에 함께 맞서고 서로를 돌보면서 세간의 시선을 거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방판 시스터즈'의 이야기는 19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다.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 심신 등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것도 그 시절의 패션과 소품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시대 배경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 생각엔 2024년 현재의 이야기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사회에 전반에 흐르고 있고, 이를 늘 경계하며 지내야 하니 말이다.
드라마 초반, 여성을 대상화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드라마의 한계를 보는 듯해 답답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이 한계야말로 현실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드라마는 이를 알려준 듯하다. <정숙한 세일즈> 속 방판 시스터즈들의 분노 그리고 공감과 평등에 기반한 연대는 2024년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들임을 말이다.
송주연 상담심리사·작가
https://naver.me/5RhWC6hJ
칼럼기사 너무 좋아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