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쁜 남자’가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로맨스 드라마의 가난한 여자주인공에게 적대적인 말을 쏟아붓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고, 벽에 여자를 밀치며 강제로 키스하는 장면이 ‘사랑’이라고 포장되던 시절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헤테로 로맨스를 소비하던 여성들은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범람을 경계하며 공생 가능성 있는, 최소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남성의 조건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년간 ‘선하게 잘생겼다’며 각광받던 남자배우들, 이를테면 박보검이나 차은우의 인기를 이같은 맥락에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상한가를 올린 정해인 역시 ‘무해함’의 대표주자로 호명되던 스타였다.
오랫동안 정해인은 누군가에게 험한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선하고 해사한 얼굴로 다정하게 말하는 그가 위협의 주체가 되는 것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우리 편’, ‘나쁜 편’을 구분하며 보게 되는 <서울의 봄>에서 오진호 소령 역으로 등장한 그를 본 관객들은 모두 안심하지 않았던가. “저 사람은…. 당연히 우리 편이야!”) 그런 그가 짧게 머리를 깎고 군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조망하던 <D.P.> 시리즈의 준호로 분했을 때, 우리는 정해인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고 표현했다. 안준호는 보통의 방관자이자 소극적 가해자를 대표한다. 현실 개선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판타지적 인물이기도 하다. <D.P.>의 정해인은 대사가 없는 순간에도 경멸과 분노, 죄책감, 자조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기력이 평가절하되기 좋은 멜로 장르에서 그가 보여줬던 재능이 재평가된 시점도 그즈음이다. 소년원을 출소한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싱글 대디로 나온 <봄밤>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필모그래피를 쌓은 그는 그리 말랑말랑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었다.
<베테랑> 이후 9년 만의 속편에 정해인이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이들이 전편의 조태오(유아인)를 어쩔 수 없이 연상했다. 하지만 서도철(황정민)이 이끄는 강력범죄팀에 새로 합류하는 신입 경찰 박선우는 조태오 같은 망나니가 아닌, 조태오를 잡는 서도철을 선망했던 청년이다. 정해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태오가 불타는 활화산이라면 박선우는 톤 자체가 차분하고 차갑기” 때문에 연기 방식도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박선우의 의뭉스러운 표정과 돌발적인 행동은 서도철의 세계에 불안한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해인은 어느덧 30대 후반에 접어든 그의 다음 챕터를 영리하게 준비한다. 그에겐 로맨스로 주목받던 시절을 거부하며 거친 남성성으로 ‘드디어 진짜 배우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경직된 강박이 없다. (커녕 그가 지금 tvN 드라마 <엄마친구아들>에 출연 중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정해인은 “감정적으로는 <봄밤>에서와 같은 멜로 연기가 내겐 더 어려웠다”며 로맨스보다 액션, 누아르 장르가 어렵다는 평범한 선입견에 개의치 않는 유형의 배우다. 대신 특유의 깨끗한 얼굴 위에 작은 의외성을 주며 작품과 캐릭터의 맥락을 만들어나간다. 폭력성과 악의를 과시하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적확히 가닿을 수 있는 ‘좋은’ 연기가 있다.
이것은 정해인이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던 이미지, 그러니까 무해성의 대척점이 아니다. 당시 정해인을 위시한 일련의 배우들을 향한 지지는 나쁨 그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충분한 근거 없이 과잉 남용되던 이미지 전시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최근 정해인이 보여준 어두운 얼굴들이 호의적인 평가를 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베테랑2>는 사법 시스템이 보장하는 정의를 불신하는 동시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정치 유튜버가 영향력을 떨치고 사적 복수가 지지받는 2024년은 9년 전 <베테랑>에서 경찰이 이끌었던 ‘사이다’ 서사가 더이상 작동할 수 없다. 그리고 정해인의 캐스팅은 가장 선명한 표현으로 복잡다단한 시대상을 대변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다. 개봉 이후 <베테랑2>의 박선우는 분명 조태오의 후계자가 아닌 별도의 카테고리에서 새롭게 논의될 것이다. 정해인 역시 황정민도 유아인도 아닌 계보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 <베테랑2> 제안을 처음 받았던 날을 기억하나.
= 그날의 분위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쉬는 날이라 성수동 카페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님이 전화를 주셨다. 요즘 뭐 하냐, 재밌는 작품을 함께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해주셨다. 어안이 벙벙하고 무척 떨렸다. 무슨 작품인지도 말씀을 안 해주셨는데 일단 알겠다고 얼른 대답했다. 어떤 작품인지도 모르고 망상을 시작했다. (웃음) <베테랑2>임을 알게 됐을 때 처음에는 기뻤고 두 번째는 부담스런 마음이 밀려왔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제작사 사무실을 찾아가 류승완 감독님을 뵙고 영화 얘기를 2시간 정도 나눴다.
-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 <베테랑2>를 어떤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들. 해외 영화와 비교도 하면서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의견도 많이 물어봐주셨다. 내가 그동안 출연했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정말 다 보셨더라. 많이 놀랐다. 특히 <D.P.>를 정말 재밌게 봤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
- 박선우는 기존 강력범죄 수사대에 새로 합류한 신입 경찰이다. 기존 멤버들 사이에 잘 어우러지기보다는 그들을 관찰하며 리액션을 담은 컷이 많았던 것 같다. <베테랑> 시리즈에 들어온 배우 정해인의 위치와도 닮았다.
= 연기가 필요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새로운 집단에 들어갈 땐 그곳의 분위기와 인물들을 분석하게 되지 않나. 실제 현장에서도 카메라의 빨간불이 들어오지 않는 순간에도 다른 캐릭터들을 관찰하며 박선우의 감정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스토리가 있다 보니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 그런데 캐릭터의 의뭉스러움을 배우의 어색함으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나. 이를테면 영화 초반부만 보고 “아, 정해인은 이런 영화에 잘 안 어울리네”라고 단정짓는다거나.
= 그런데 그런 얘기는 안 나오지 않을까? 캐릭터가 신입인 것과 배우의 역량은 당연히 구분될 거다. 배우가 자신감이 없으면 배우를 그만둬야지. (웃음) 존재 자체만으로 불길한 공기와 불안감을 스멀스멀 주는 것이 류승완 감독님이 말해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갑자기 불쾌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과는 다르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사람이 미친 듯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거슬릴 때, 늦은 밤 딱히 누가 날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같은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질 때, 그런 느낌을 담아 연기했다.
- 원래 정해인이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캐릭터는 아니지 않나. (웃음) 연기해보니 어떻던가.
=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감독님과 함께 모니터를 하면서 지금껏 살면서 보지 못했던 내 얼굴들을 봤다.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지만, 류승완 감독님은 무척 좋아하셨다.
- 정해인이 그런 연기를 해낼 수 있는 재료는 어디에서 오는 것 같나.
= 배우 각자 갖고 있는 색깔과 에너지가 있다. 원래 내가 갖고 있던 컬러가 캐릭터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연기는 결국 기술적인 부분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유년 시절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경험과 학습과 인성과 태도가 종합적으로 뭉쳐서 나오게 된다. 때문에 어떤 배우를 보면 저 사람이 무척 잘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외국 배우를 볼 때도 그렇다. 아마 내가 박선우를 연기할 수 있는 근거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누구나 분노하고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여러 감정을 겪으며 살아간다. 물론 경험이 아닌 상상이나 공부를 통해 표현해야 하는 영역도 있다. 일상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어두운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현장에서 악의를 갖고 연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착하고 선한 사람일수록 악한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박선우를 연기할 때는 어땠나. 분석을 많이 했나.
= 박선우는 자기만의 명확한 신념을 갖고 있다. 배우가 너무 많은 상상을 해서 서사를 구축하면 어려워지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모호하고 다면적인 것보다는 정확함을 추구했다.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나눈 부분이다.
- <베테랑> 시리즈는 화려하기보다는 ‘막싸움’식의 액션을 보여준다. 박선우는 UFC 기술을 연마한 신입 경찰이다.
= UFC 기술을 쓰지만 류승완 감독님은 좀더 거칠고 라이브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액션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배우로서 스턴트 대신 직접 액션을 소화하고 싶은 욕심이 날 때가 있는데 류승완 감독님은 무리한 동작은 못하게 한다. 오히려 그림도 잘 안 나오고 현장에선 철저하게 약속된 액션을 사고 없이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감독님은 명확한 콘티하에 배우가 잘할 수 있는 것, 스턴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 체계적으로 찍는다. 또한 배우가 몸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다.
- 그렇다면 <베테랑2> 제안을 할 때 이미 정해인은 액션을 어느 정도 잘하는 배우라고 판단을 한 거네.
= 내가 감독님에게 부탁했다. 액션을 많이 했던 <설강화>를 봐달라고. (웃음) 그 긴 드라마를 다 보셨더라. 너무 감사하다.
- 이전에 외유내강과 <시동>을 함께한 적이 있다. 어떤 현장으로 기억되나.
= 당시 드라마 <봄밤>을 같이 찍을 때였다. 워낙 (박)정민이 형을 팬으로서 좋아했기 때문에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실제 같이 작업해보니 정말 위트 있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마동석 선배님도 각종 애드리브를 계속 제공하는 아이디어 뱅크였고 후배들의 의견도 잘 물어봐줬다. 사실 긴장을 좀 했었는데 먼저 다가와 편하게 해주셨다. 할머니로 나왔던 고두심 선생님과 함께한 신들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 이미 드라마에서 자리 잡은 배우가 블록버스터급이 아닌 영화의,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로 들어간 게 의외라고 하는 이들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 할리우드에서도 유명 배우들이 작은 역할로도 잘 나오지 않나. 영화, 드라마를 굳이 나누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게 중요하지 배역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새삼 정해인은 제복을 입고 나오는 작품들이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슬기로운 감빵생활>부터….
= 아니, 그건 죄수복이지 않나. (일동 폭소)
- 어떤 의미에서는 제복이고, 감옥에 가기 전에는 군복을 입었으니까. (웃음) <D.P.>와 <서울의 봄>은 군복, <당신이 잠든 사이에> <베테랑2>에서는 경찰복을 입었다.
= 그러게. 왜 그럴까. 제복을 입을 때 좀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분들의 옷이다 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우리가 한복을 입으면 좀더 예의를 갖추고 추리닝을 입으면 땅바닥에 쭈그려 앉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를 이른바 ‘요약본’으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일부를 짧게 편집한 영상을 보고 ‘명연기’라고 감탄하는 경우도 있다.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더 호평받기 쉬운 종류의 연기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시대에 극장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짧은 영상만 보다 보면 2시간짜리 영화는 길게 느껴져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짧게 편집된 연기만 보고 평가하는 것은 책 표지만 보고 판단하는 것과 똑같다. 때문에 타협하고 휩쓸리면 안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40~50년 전에 만들어진 훌륭한 영화들을 아직 보는 것처럼 우리는 <베테랑2> 역시 한국영화의 계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자며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
함께 작업한 이들이 말하는 배우 정해인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해인의 모습은 그려낸 듯 잘생긴 얼굴 속에 범죄적 욕망을 감추고 있는 신을 연기할 때다. 그는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을 떠올리게 만든다. - 정지우 감독(<유열의 음악앨범>)
= 정해인의 단단한 두눈을 좋아한다. 그의 클로즈업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진 않겠다는 선전포고로 읽힌다. 그건 흉내낼 수 없는 타고난 분위기다. - 한준희 감독(<D.P.> 시리즈)
=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정해인 배우를 만났고 드라마 <반의반>도 함께했다. 작품에서 함께한 정해인은 떨림이 있는 배우였다. 불안과 상처를 섬세하게 표현해서 그 떨림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린 연민을 느끼게 만들었다. 개인으로 함께한 정해인은 열정과 노력을 가진 진지한 청년이었다. 항상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면에는 뜨거운 열정과 욕심, 욕망을 품고 언제나 노력하는 배우였다. - 김재중 무비락 대표(<유열의 음악앨범> <반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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