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성재가 드라마 <최악의 악> 출연을 결정한 곳은 한동욱 감독에게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힌 뒤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이미 하기로 한 작품이 몇 있어 죄송하다는 얘기를 드리고 나왔는데, 이 드라마를 얼마나 잘 만들고 싶은지를 5~6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던 감독님이 눈에 밟혔다. 그 순간, 이건 하는 게 맞음을 직감했다.” 늦지 않게 기회를 잡은 그가 <최악의 악>에서 맡은 역할은 1990년대 거대 마약 밀매 조직인 ‘강남연합’의 2인자 최정배다. 극 중 최정배의 거의 모든 대사가 보스 기철(위하준)을 부르는 “형님”으로 끝났다면, 인터뷰에서 임성재의 거의 모든 답변은 “효율적”이라는 말로 귀결됐다. 그가 말하는 효율적인 연기란 대본에 있는 것들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없는 장면을 추가하기보다는 표정이나 제스처를 디테일하게 표현했을 때” 감독의 의도에 어긋나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거라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대본에 없는 정배의 전사를 상상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캐릭터 본연의 성격을 다르게 해석할 위험이 있을 거란” 걱정 때문이었다. 씨름을 한 과거가 있었지만 이를 액션 신에 활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액션에서조차 감정이 중요한 드라마에서 기가 막힌 스포츠 기술을 보여주는 건 작품 톤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현재에 집중했다. 의리밖에 모르던 기철이 갑자기 나타난 첫사랑(임세미)에게 흔들리고, 새로 들어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승호(지창욱)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정배가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할지를 고민했다.
임성재가 뽑은 ‘최고의 효율 신’은 7회에서 정배가 자신을 배신자 취급하는 기철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그는 형에 대한 애증을 숨김없이 투명하게 얼굴에 띤 이 신을 전에 없이 오래 준비했다. “정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눈빛을 한 기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타이밍부터 돌아서는 각도까지 다 계산했다. 함께한 20년 세월이 허물어져가는 걸 느끼고 있을 정배의 서러움을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다 보니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최악의 악>에서 그가 이토록 대본 중심의 연기를 추구한 까닭은 “그렇게 했을 때 시청자에게 정확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계획한 대로만 가면 연기하는 입장에선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배우가 자신의 감정을 너무 우기면 작품에 담긴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전혀 안 하는 건 아니다. 캐릭터에 충분히 녹아든 상황에서 나오는 애드리브도 그것대로 효율적이다.”
최정배에게 식구를 만들어준 강남이 있다면 임성재에겐 연극을 해온 고향 광주가 있다. 그곳에서 들은 칭찬이 그를 무대로 이끌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단편을 만든다는 동네 형이 배우가 필요하다며 나를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켰다. 내 연기를 보더니 잘한다면서 앞으로 배워서 다듬으면 더 잘할 것 같다고 해줬다.” 그 칭찬이 잊히지 않았던 그는 결국 경영학도의 길을 그만두고 집에서 가까운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각종 행사 MC로 일하며 극단 생활을 이어갔다. 원대한 목표가 있거나 선택한 직업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고생길을 자청한 건 아니었다. “연기가 변함없이 즐겁고 배우라는 직업만이 매번 내게 새로운 역경과 기분을 가져다준다. 좋으니까, 계속하는 거다.” 임성재는 2022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눈을 한껏 접어 웃으며 푸근한 이미지를 부각한 털보 사장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사실 그는 유한 얼굴 윤곽에서는 온기가, 매서운 눈매에서는 냉기가 흘러 상충하는 마스크를 가졌다. 연출자가 그에게 호인과 악인을 넘나드는 역할을 맡기고 싶어 하는 이유다. 감독의 비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신체적 강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지략가형 배우는 올해 순순한 줄 알았으나 실은 극악했던 <D.P.> 시즌2의 나중석과 깍듯한 부하에서 조직의 배신자로 돌변하는 <무빙>의 민기를 통해 자기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싶어 하는 카메라 앞에서 감독이 원하는 초상이 됐다. 임성재의 차기작은 막 촬영을 끝낸 <지옥2>다. 암울한 제목의 작품을 연달아 찍게 됐으나 저력 있는 배우가 제목 따라갈 일은 없을 듯하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임성재는 지금 축복 가득한 미래로 향하고 있다.
FILMOGRAPHY
영화
2023 <타겟>
2022 <앵커> <비상선언> <헌트> <공조2:인터내셔날>
2021 <언프레임드 – 재방송> <야행>
2020 <보고타> <내가 죽던 날>
2019 <자산어보> <헤븐> <나랏말싸미>, <시동>
2018 <변산> <국도극장>
드라마
2023 <최악의 악> <무빙> <D.P.2> <택배기사> <낭만닥터 김사부3>
2022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2021 <빈센조>
2020 <허쉬>
2019 <웰컴2라이프>
2018 <KBS 드라마 스페셜 – 도피자들>
https://naver.me/GDNUTwfW